1924년 여름 중국 북경 (中國北京) 국립사범대학 (國立師範大學) 재학중 (在學中) 하기방학 (夏期放學) 으로 귀향 (歸鄕) 하였다가 조선학생총연합회 (朝鮮學生總聯合會) 의 발기인 중 (發起人中) 1인 (人) 으로 가입 (加入) 한 후 (後) 중국내 (中國內) 한인 학생 (韓人學生) 들의 가입권장 (加入勸獎) 을 위한 책임 (責任) 을 지고 파견 (派遣) 되었으며 1928. 7. 21 북경한인청년단 선전원 (北京韓人靑年團宣傳員) 으로 입국 (入國) 하였다가 [서울]에서 피체 (被逮) 되어 신의주지방법원 (新義州地方法院) 에서 징역2년을 받았고 그 후 (後) M.L당 (黨) 창당 혐의 (創黨嫌疑) 를 받아 피체 (被逮) 되었다가 석방 (釋放) 되었으며 1929년에는 중외일보 상무 (中外日報常務) 로 1930년에는 상무취체역 (常務取締役) 으로 언론 창달 (言論暢達) 에 기여 (寄與)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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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거창(居昌) 사람이다.
1924년 여름 중국 북경(北京)의 국립사범대학에 재학중 하기방학으로 귀향하였을 때 서울에서 준비중인 조선학생총연합회(朝鮮學生總聯合會)의 결성을 위한 발기회(發起會)에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고 중국내에 있는 한국인 학생들의 가입 권유를 위하여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봄 북경 국립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6월 중순경 귀국하였는데 조선학생총연합회 관련 사실로 인해 일경에 붙잡혔다가 1927년 7월 25일 석방되었다.
1928년 2월 5일 제3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조직에 연루되어 김준연(金俊淵)·온낙중(溫樂中) 등과 함께 일경에 붙잡혔다가 1928년 2월 13일경 석방되었다.
그후 동년 7월 21일 북경 한인청년회(韓人靑年會)에 가입한 뒤 선전원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재차 일경에게 붙잡혀 1928년 12월 1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9월 1일 출옥한 후 그는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상무로서 경영을 맡았으며, 1930년 안희제(安熙濟) 사장이 재임시 상무취체역이 되어 언론창달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919面
- 韓國言論史硏究(鄭晋錫) 234·23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71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590·594·595面
- 每日申報(1928. 12. 7)
- 朝鮮日報(1928. 1. 20, 2. 5, 2. 15, 12. 5)
- 中都日報(1989. 4. 11)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494面
- 東亞日報(1924. 9. 2, 1926. 7. 6, 7. 27, 1928. 10. 12, 12. 6,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