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4.16 경남 (慶南) 합천 (陜川) 해인사 (海印寺) 의 승려 (僧侶) 로서 10,000여명 (餘名) 의 군중 (群衆) 을 선도 (先導) 하며 독립만세 시위 운동 (獨立萬歲示威運動) 을 전개 (展開) 하였고 그 후 만주 (滿洲) 로 망명 (亡命) 하여 만주 (滿洲) 유하현 (柳河縣) 에서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를 수료 (修了) 한 후 (後) 국내 (國內) 에 들어와서 경북 (慶北) 문경군 (聞慶郡) 금룡사 (金龍寺) 대무사 (大無寺) 등 여러 사찰 (寺刹) 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獨立運動軍資金) 을 모집 (募集) 하여 만주 (滿洲) 에 있는 한족회 (韓族會) 에 송부 (送付) 하다 체포되어 소위 (所謂) 제령 (制令) 제7호 (號) 로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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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거창(居昌)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경남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의 승려로서 학생대표 김봉신(金奉信)과 독립선언서 1만여매를 살포하며 다수의 군중과 더불어 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시위를 하였고 같은 해 4월 16일에는 결사대 제3대 책임자로서 해인사 입구에서 1만여 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한 후 간도(間島)로 망명하였다.
1919년 11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수료하고 제1군정서지구(軍政署地區) 경비대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9월경 해인사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각지의 사찰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간도의 한족회(韓族會)로 송부하며 독립운동 원조를 계속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는 1921년 3월 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금룡사(金龍寺)·대무사(大無寺) 등에서 김봉진(金奉津)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1921년 5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 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3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65面
- 東亞日報(1921. 3. 4)
- 判決文(1921. 5. 25 京城地方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878·885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