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 3월 정용기 (鄭鏞基) 가 산남창의진 (山南倡義陣) 을 거의 (擧義) 하고 의병장 (義兵將) 으로 추대 (推戴) 되자 박한종 (朴漢宗) 과 함께 영산 (靈山) 청도 (淸道) 등지 (地) 에서 의병 초모 (義兵招募) 와 군수품 (軍需品) 의 조달 (調達) 등의 활동 (活動) 을 하고 신병 (身病) 으로 인 (因) 하여 입진 (入陣) 을 못하고 있다가 동년 (同年) 9월 입암전투 (立岩戰鬪) 에서 정용기 의병장 (鄭鏞基義兵將) 을 비롯하여 3장군 (將軍) 들이 전몰 (戰歿) 하고 그 뒤를 이어 정환직 의병장 (鄭煥直義兵將) 이 전패 (戰敗) 하여 순국당 (殉國當) 하자 그 후임 (後任) 인 최세한 의병장 (崔世翰 義兵將) 휘하 (麾下) 에서 참모장 (參謀將) 이 되어 활동 (活動)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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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킬 때, 박한종(朴漢宗)과 함께 영산(靈山)·밀양(密陽)·청도(淸道) 등지에서 의병소모와 군수품 조달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으나 신병으로 인해 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뒤 1907년 10월 죽장(竹長) 입암(立巖)에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이 모두 순국하고 의진이 해산될 때 정환직(鄭煥直)이 잔여의병을 수습, 산남의진이 재기하게 된다. 그러나 정환직 의병장도 영덕(盈德)에서 순국하게 되자. 1908년 1월에는 최세한(崔世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그 참모장(參謀將)이 되어 5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군과 항전을 벌였다. 그 뒤 의성(義城)에서 패한 뒤에는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山南義陣遺史 25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2面
- 山南倡義誌(下) 56·5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