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그는 1942년 7월경 창원군 창원면 동정리(東井里) 소재 창원신사(昌原神社) 뒤에서 창원보통학교(昌原普通學校) 출신의 급우 박상규(朴尙圭)·박대근(朴大根) 등 10여 명과 함께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청년독립회(靑年獨立會)를 조직하여 신사참배거부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을 강점한 이래 일관되어 온 것이었으나 1931년 만주침공 이래 강화되었으며,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폭압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우는 상황에서 일제는 소위 국민총동원체제 아래 민족말살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해 갔다. 이러한 때 김명수 등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1943년 4월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창원역과 주요 관문에 붙임으로써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이들의 활동이 1944년 12월 진해헌병대에 의해 발각되었고, 일제는 이 일을 '창원만세사건'이라 불렀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이첩 계류되어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여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그러나 고문의 여독으로 그는 백정기(白政基)와 함께 출옥 직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재소자인명부(부산교도소)
- 출소확인증명원(부산구치소)
- 출소증명원(부산구치소)
-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698∼700면
- 내고장 傳統(마산시, 1982) 109∼111면
- 부산일보(1985. 10. 15)
- 경남신문(1986. 3. 12)
- 서울신문(1989. 6. 6)
- 한약협보(1990.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