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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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斗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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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애족장
1908년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양(平壤) 지회(支會)평의원(評議員)과 반장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사내총독 암살모의(寺內總督暗殺謀議)사건(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1912년 재판에서 징역 6년을 받았으며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무죄 방면(無罪放免)되기까지 2년 3개월(個月)여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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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평양(平壤)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사로서 신민회(新民會)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숭실중학(崇實中學)을 거쳐 숭실대학을 졸업한 그는 1908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울 때 교사로 참가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08년 11월 도산의 권유로 학교 관리와 교수 방침을 정비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장응진(張應震) 등과 함께 일본 학교들을 시찰하기도 했다. 그는 도산에게 도서관 설립을 제의하는 등 대성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청년학우회 발기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울러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양지회 평의원과 반장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소위 데라우치[寺內]총독암살모의사건(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1912년 재판에서 징역 6년을 받은 후, 1913년 3월 무죄판결을 받기까지 약 2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2. 9. 28)
  • 每日申報(1912. 7. 11·9. 29, 1913. 3. 21·3. 23)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1권 775면, 제2권 66·67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1권 259~276면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13. 3. 2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권 758·760~765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202·217~21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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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두화 호 : 해암(海庵) 황해도 중화(中和) 105인사건
본문
1884년 2월 15일 황해도 중화군(中和郡)에서 태어났다. 호가 해암(海庵)이다.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재학 중 1907년 1월 평안 지역과 황해 지역의 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1909년 6월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즈음 안창호(安昌浩) 등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해 여름 면학회(勉學會)에서 개최한 제2회 하기사범강습회에서 300여 명의 젊은이를 가르쳤다. 1908년 11월에는 안창호의 권유로 학교 관리와 교수 방침을 정비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장응진(張應震) 등과 함께 일본 학교들을 시찰한 뒤, 안창호에게 도서관 설립을 제의하는 등 대성학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1909년 5월에는 안창호가 국권 회복을 위해 구국 청년단체로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하여 애국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대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07년 4월 신민회가 양기탁(梁起鐸)·안창호·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창립되자, 1908년 봄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남도지회의 평의원과 반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9월 붙잡혔다.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한 데 이어 1913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2년간의 옥고를 겪고 잔혹한 고문에 오른쪽 팔이 부러져 평생 불구가 되었다. 석방된 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 등과 대종교 활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시영과 함께 『단기고사』를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1951년 1·4후퇴 당시 월남하였다. 충북 산골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민족정기를 일깨우다가 1957년 상경하였다. 1967년 10월 12일 작고하여 영락교회 공원묘지에 묻혔다. 2006년 9월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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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모살미수 징역 6년 경성지방법원 1912-09-28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모살미수 무죄(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13-03-2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모살미수 무죄(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검사 1914-03-1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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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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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독립유공자 추모비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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