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 9. 15 전남 (全南) 완도군 (莞島郡) 소안면 (所安面) 에서 노농연합대성회 (勞農聯合大成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입석 (立席) 한 일경 (日警) 을 퇴장시킨 후 악질 지주 (惡質地主) 에 대한 절교 (絶交) 를 결의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3월 16일 여 (餘) 의 옥고 (獄苦) 를 치른끝에 면소 (免訴) 되었으며 1925. 11. 8 배달청년회 (倍達靑年會) 집행위원회 (執行委員會) 의 사회를 맡아 도초도 (都草島) 소작쟁의 (小作爭議) 에 지원금 (支援金) 을 보내기로 결의하였고 1925. 12월 노농연합대성회 (勞農聯合大成會) 중앙집행위원회 (中央執行委員會) 의 사회를 맡아 농민운동 (農民運動) 과 노농단체 (勞農團體) 결성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1926. 4월 완도청년연합회 (莞島靑年聯合會)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의장 (議長) 으로서 노농운동 (勞農運動) 등 각 (各) 부문별 (部門別) 운동 (運動) 의 추진방안을 논의하는 등 활동 (活動)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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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1924년 3월 송내호(宋乃浩)·정남국(鄭南局) 등과 함께 완도군 소안면(所安面)내 각 리(里)의 노동단체를 연합하여 회원이 7백 명에 달하는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를 조직하고 간부직을 맡아 활동했다.
노농연합대성회는 1924년 9월 25일의 제2회 정기총회 개최시에 입석한 일경(日警)에게 퇴장을 명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상방(喪房)을 철폐하며, 소작인을 기만한 악질 지주와의 절교를 선언하는 등의 활동을 펴 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불온시한 일경에 의해 그는 1924년 10월 대성회의 다른 간부 11명과 함께 구속되어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5년 11월 8일에 열린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집행위원회의 사회를 맡아 도초도(都草島) 주민들의 소작쟁의에 지원금을 모금하여 보낼 것을 결의하였고 그 해 12월 31일에는 소안도(所安島) 노농연합대성회 중앙집행위원회의 사회를 맡아 노농운동의 조직과 지주대책에 관한 결의를 이끌어 냈다. 또한 1926년 4월 25일의 완도청년연합회(莞島靑年聯合會) 제3회 정기총회에서도 의장으로서 사회를 맡아 청년, 노동, 농민, 여성, 소년 등 각 부문운동의 추진 방안을 논의하게 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청년운동사(선우기성, 1973. 5. 1) 359면
- 동아일보(1925. 2. 9, 11. 21, 1926. 1. 6, 4. 25)
- 조선일보(1924. 10. 23, 10. 24, 10. 28, 1925.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