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전남 완도(莞島) 사람이다.
1924년 3월 송내호(宋乃浩)·최평산(崔平山) 등과 함께 완도군 소안면(所安面) 내각리(里)의 노동단체를 연합시켜 회원이 7백 명에 달하는 노농연합대성회(勞農聯合大成會)를 조직하고, 이어서 완도군 내의 7개 청년회와 9개 노동단체를 묶어 완도청년연합회(莞島靑年聯合會) 및 완도노농연합회(莞島勞農聯合會)를 조직하여 간부로 일하였다.
1925년 1월 28일 완도면 화흥리(花興里) 개량서재(改良書齋)에서 개최된 완도무산청년회(莞島無産靑年會) 임시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독서회·토론회·야학 등의 개최 또는 개설」, 「순회문고 설치 및 신문·잡지 공동 구독」 등 청년교양의 방안과 「타협적 민족운동의 박멸」이라는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를 이끌어 냈다.
1926년 6월에는 합리적 신사회 건설을 표방하여 송내호(宋乃浩)·강정태(姜正泰) 등과 함께 비밀결사 「살자회」를 결성하고 선전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 무렵 일제 당국은 소안도(所安島) 주민 및 청년단체들의 사상 성향을 매우 불온시하여, 일찍이 1923년 5월에 소안도 주민 800명의 의연금 1만 4백 원으로 신축 설립된 사립 중화학교(中和學校)를 독립군과 사회주의자 양성기관이란 명목으로 자진 폐쇄토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1927년 5월에 강제 폐교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 조처에 주민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경은 그 동안 소안면의 노농운동과 청년운동을 이끌어 온 지도급 인물들을 1927년 10월경부터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른 12명의 동지와 함께 붙잡혀 1929년 3월 2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30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도 그는 일제의 탄압에 굴함이 없이 1931년 6월 초순부터 7월 사이에 완도면 대신리(大新里) 유치원에서 경제학강좌회(經濟學講座會)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또한 윤덕률(尹德律)에게 「국어와 일본어」라는 제목의 강연원고를 주어, 같은 해 9월에 윤덕률이 수십 명의 청중 앞에서 "국어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함양하는 가장 중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에게 국어를 말살시키고 외국어 즉 일본어를 자국어로 가르쳐서 국민성까지 말살시키려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게끔 지도하였다.
이에 앞서 이응길(李應吉)·장명재(張明在) 등이 그의 지도를 받고서 1928년 1월 5일 완도면에서 「농민 본위의 신사회 건설」 등의 강령을 가진 비밀결사 신우회(新友會)를 조직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그는 1933년 1월 재차 일경에 붙잡혀, 1933년 3월 17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두 번째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3. 5. 22 대구복심법원)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동아일보(1926. 6. 22)
- 조선일보(1925. 2. 14, 1928. 10. 25, 1929. 2. 18, 2. 19, 2. 28, 1930. 4. 3, 1933. 3. 13, 3. 21)
- 판결문(1930. 3. 31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2집 1099∼11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