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성주군 초전면 동호리(草田面 東湖里)에 거주하면서 성주읍 독립만세운동에 기독교측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성주군은 옛부터 유림(儒林)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배일사상이 특히 강한 곳인데,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성주읍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이미 1919년 3월 28일 장날 선남면 선원리(船南面 仙源里)에 사는 이현호(李玄琥) 등이 성주읍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4월 2일 유림계통과 기독교계통이 연합전선을 펴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유림계통에서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기독교측은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3월 30일 유림측의 송회근(宋晦根)과 만나 공동전선을 펴기로 협의하고 거사일에 사용할 태극기의 제작을 부탁하였다.
이때 기독교측에서도 성주면 경산동(京山洞)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각면의 교인과 각 처의 교회간부들을 규합해 가고 있었다.
1919년 4월 2일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여든 기독교인들은 먼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성주읍 장터를 향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여 장터 중앙에 모였던유림측과 합세하여 경찰서에서 군청앞으로 시위행진하고, 다시 우편소 앞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그는 이때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4. 30 大邱地方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65∼46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