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20년 9월 23일 김장석(金章錫)·김상익(金相翊) 등과 함께 원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미 1919년 3월 1일 원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가,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김장석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당시 이 사실을 안 그는, 동아일보 원주(原州)주재 통신원으로서, 김장석·김상익·조병철(趙秉喆)·김병륜(金秉綸)·이용헌(李容憲) 등과 만나 다시 한번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그들의 식민통치를 세계에 선전하기 위하여 미국 국회의원을 서울에 초청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장석 등과 상의하여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잔혹상을 폭로하고자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다.
이에 그는 미국 의원단의 방문을 환영하는 문서를 만들어, 미국 의원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국내 유지들에게 배포하기로 하였다. 즉시 김장석이 초안한 환영문을 등사하여 김상익으로 하여금 서울에 배포하도록 하고, 만세시위 일자를 9월 23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제대로 사전 연락을 취하지 못하였다.
만세시위 예정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를 못한 비탄감에 빠진 그는 이날 밤 최종빈(崔鍾濱)·최종현(崔鍾炫)과 함께 남산교(南山橋) 부근을 거닐었다. 이때 최정빈이 우리끼리라도 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여 그들 셋은 즉석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원산 청년회관에서 이 소리를 들은 김장석·김상익 등이 급히 군중을 동원, 이에 가세하여 시위는 점차 대규모화되었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산교를 출발하여 시위행진을 하고, 밤 10시경에는 조선식산은행 원산지점·동양척식회사 원산지점·우체국·경찰파출소 등을 습격하였다.
급보를 받은 원산경찰서장 곡천(谷川)이 경찰을 비상 출동시켜, 칼을 휘두르며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자, 경찰서장은 무차별 사격을 명령하여, 결국 사상자를 낸 채 해산되었다. 그후 그는 일제의 검속때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1면
- 동아일보(1920. 9. 25, 1921. 2. 23, 1921. 2. 24)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56·4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673∼67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