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음 (陰) ) 11월 양윤숙 의진 (楊允淑義陣) 에 들어가 동료의병 (同僚義兵) 5인 (人) 과 같이 총 (銃) 3정 (挺) 으로 무장 (武裝) 하고 순창군 (淳昌郡) 아동면 (阿東面) 녹사리 (綠絲里) 이도사 (李都事) 로부터 군자금 (軍資金) 으로 엽전 (葉錢) 50양 (兩) 을 모금 후 (募金後) 피체 (被逮) 되어 징역 7년을 받고 옥고 (獄苦) 중 같은 감옥 (監獄) 에 수감 (收監) 되어 있는 이성용 (李成用) 과 함께 탈옥 계획 (脫獄計劃) 을 세워 1910.2.9 점검 (點檢) 나온 간수 (看守) 의 총 (銃) 과 「칼」을 탈취 (奪取) 하고 탈옥 (脫獄) 하려 하였으나 증파 (增派) 된 간수 (看守) 들로 말미암아 미수 (未遂) 에 그치고 재판 (裁判) 에 회부 (回附) 되어 교수형 (絞首刑) 을 받아 순국 (殉國)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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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북 순창(淳昌) 사람이다.
1908년 11월 양윤숙(楊允淑)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간 뒤, 동료 의병 5명과 함께 순창군 아동면(阿東面) 녹사리(綠絲里) 이도사(李都事)로부터 군자금 50냥을 모금하다 붙잡혔다.
그 뒤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감옥 전주분감(全州分監)에서 옥고를 치러던 중 이성갑(李成甲)등 수명과 함께 1910년 2월 9일 간수들의 무기를 탈취해 탈출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다시 재판에 회부되어 1910년 3월 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죄수도주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4월 7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09. 11. 22 光州地方裁判所 全州支部)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736·855·85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