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목포공립상업학교 측은 광주지역과 목포지역 학생들의 교우 관계와 편지 연락 등을 감시했다. 또한 학부모에게도 자녀들이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지 않도록 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 18일 밤 목포공립상업학교장은 다음날 오전 10시를 기해 학생들이 가두행진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11월 19일 목포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예정대로 가두행진을 주도했다. 오후 1시경 목포공립상업학교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인근에서 행진이 시작됐다. 약 30명의 학생들은 ‘피감금 학생 즉시 탈환’, ‘총독 폭압정치 절대반대’ 등의 깃발을 들고 행진했다. 목포공립상업학교 학생행동대는 남교동(南橋洞), 무안동(務安洞)을 거쳐 시가로 가면서 격문을 뿌렸다. 학생들은 6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목포경찰서(木浦警察署)는 학생 27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목포 학생운동은 11월 22일에도 이어졌다. 오전 9시 수업이 끝나자 한국인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김병용 등은 11월 19일 가두행진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학생 32명의 석방을 외치며 항의했다. 11월 1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있었던 이와같은 목포지역 학생운동에 의해 36명의 학생이 체포됐으며, 72명이 무기정학이나 근신 등의 처분을 받았다.
김병용은 동맹휴교를 주도해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자 1930년 2월 28일 퇴학했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학적부(學籍簿)(목포상업고등학교)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565~56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