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채규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 재학 중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발단이 되어 한·일 중학생 사이에 충돌이 거듭되자, 11월 1일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교섭에 앞장섰다. 그는 목포발 광주행 통학생 단장으로 같은 학년 을조(乙組) 급장(級長) 노병주(盧秉柱)와 함께 양측 학생대표 회합에 한국학생 대표로 참석하여 문제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 학생들의 교만 방자한 언동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학교로 돌아와 회합의 내용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채규호는 11월 3일, 1차 궐기 시 가두투쟁 때에 행동대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었다. 약 4개월여의 옥고를 치르고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東亞日報(1930. 2. 20, 2. 22, 3. 1)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9권 403·408·409·416·417면
- 受刑人名簿(朝鮮總督府 裁判所)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9권 534·549·555·5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