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군(光州郡)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구속학생 석방’과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 ‘독립만세’ 등을 외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의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조시위를 추진하였다. 1930년 1월 21일 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전달준은 학우인 이홍우(李鴻雨)와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1월 24일 이홍우의 하숙집에서 동지들과 만세시위운동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목판을 조각하여 찍어낸 백지에 괘를 그려 이튿날까지 태극기 7백여 매를 제작하였다. 이어서 ‘노예교육 타파’ 등을 크게 쓴 선도기(先導旗) 8개를 제작하였다. 전달준은 이렇게 준비된 선도기와 태극기를 학교 교내에 감추어 두었다. 거사일인 1월 25일 학급의 학우들에게 방과 후에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임을 알리고 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마침내 방과 후인 12시 40분경 전달준은 25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성 서문 밖에 집결했다. 2학년생 약 40명이 선발대로 경성공립농업학교(鏡城公立農業學校)로 몰려가 강당 안에 태극기를 던져 넣었다. 선도대와 다시 합류한 학생들은 큰 기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남문 밖 신남문을 거쳐 경성공립농업학교로 행진하였다. 동교 교정에 이르자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동참을 촉구하였다. 이후 시위대가 서문을 향해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30년 3월 6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4일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3월 7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30. 4. 24)
- 가출옥관계서류(假出獄關係書類)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30. 1. 27, 2. 10, 2. 25, 3. 6, 3. 12)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2. 6, 2. 18, 3. 7, 3. 9, 3. 15)
- 중외일보(中外日報)(1930. 2. 7, 2. 18, 3. 7, 3. 9)
- 사상월보(思想月報)(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1) 제1권 제6호 5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13집 1527~1532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9권 625~6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