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30년 평북 정주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동조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전국 각지에서 광주학생시위운동에 호응하는 동조시위가 전개되자 오산고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동급생인 선우기성(鮮于基聖)과 의기투합하여 선우기성은 격문을 작성하고 임창원은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1930년 1월 17일 교우회(校友會)의 회장인 신기복(申基福)이 거사계획에 동참함으로써 용기백배한 이들은 그날 밤 학교 교실을 돌며 책상 서랍에 격문을 투여하였다.
이튿날인 1월 18일 오전 노명길(魯命吉)이 3학년 교실에서 총독정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자 학생들의 기세는 폭발하였다. 임창원의 만세 선창을 신호로 궐기한 500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시가로 뛰쳐나가 '대한독립 만세''약소민족 만세''단결 만세''학생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30리나 떨어진 정주읍으로 향하는 도중 신기복과 임창원이 번갈아 가며 즉석 연설을 하여 군중의 사기를 높였다.
정주읍내로 진출 중 이언면사무소(伊彦面事務所) 앞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한국인 순사를 구타 응징하였다. 학생들은 정주읍내를 시위행진하고 정주정거장에 이르러 파출소 순사들과 충돌하였다. 격투가 벌어져 순사와 임창원 등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결국 출동한 일경에 의해 그를 비롯한 주동인물들은 체포되었고, 남은 학생들은 경찰서 앞에 이르러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통곡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퇴학을 당하고 1930년 3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치안유지법, 공무집행 방해 등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學籍簿(五山高等學校)
- 五山70年史(同編纂委員會, 1978) 242∼249面
- 光州學生獨立運動史(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1974) 595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635∼640面
- 東亞日報(1930. 1. 19, 1. 20, 1. 21, 1. 22, 2. 3, 2. 12, 2. 13, 3. 27,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