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에서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光州中學校) 학생들이 광주역(光州驛) 앞에서 집단으로 격투를 벌였다. 격투 후 학교로 돌아간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대책을 협의하여 시위행진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학생들은 오후 1시경 대오를 짜고 교문을 출발하여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관의 제지를 무릅쓰고 시내를 행진한 후 오후 3시경 학교로 돌아왔다.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안진도 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편파적인 조치에 항거하여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광주공립농업학교(光州公立農業學校), 전남사범학교(全南師範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재시위가 추진되었다. 11월 11일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간부인 장재성(張載性)이 작성한 격문을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독서회 회원인 오쾌일(吳快一) 등이 인쇄하였다.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용감히 싸워라, 학생 대중이여」, 「활발한 학생대중이여, 우리들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등 4종의 격문 4,000여 매가 준비되었다.
11월 12일 아침 김안진은 오쾌일로부터 격문 500여 매를 전달받아 등교 후 학우들에게 이를 교부하며 시위운동 때 살포할 것을 의뢰하였다. 수업이 시작되자 김안진을 비롯한 학생들이 일제히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검거된 학생을 제외한 전교생이 참여하였다. 김삼석(金三錫) 등 학생들은 그에게서 받은 격문을 학교 교정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光州女子高等普通學校) 부근 길가에 살포하였다. 학생들은 시내 우편국과 형무소를 지나 전남사범학교 앞까지 진출하여 함성을 올리며 시위를 벌였다.
김안진은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8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0. 5. 15)
- 동아일보(東亞日報)(1930. 2. 20, 2. 21, 2. 22, 2. 27)
- 중외일보(中外日報)(1930. 2, 3, 2. 8, 2. 11, 2. 20, 2. 21, 5. 3, 5. 16)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2. 14, 2. 20, 2. 21, 5. 3, 5. 16)
- 매일신보(每日申報)(1930. 5. 3, 5. 17)
- 수형인명부(受刑人名簿)
- 집행원부(執行原簿)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사상월보(思想月報)(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1) 제1권 제6호 5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13집 1512~1524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9권 542~546, 555, 55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