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김두성은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제주청년동맹(濟州靑年同盟) 함덕지부(咸德支部)에서 활동했다. 1930년 12월 중순경부터 1931년 3월 중순경까지 제주도(濟州島) 신좌면(新左面) 함덕리(咸德里)에서 방 하나야학(夜學)을 개설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김희례(金熙禮) 등 여학생 10여 명을 대상으로 국어, 산술 등을 교수하는 한편, 마르크스와 레닌 등 사회주의운동가를 소개하고 노동자 중심의 신사회 건설에 대해 설명했다.
같은 함덕리 출신으로 일본 도쿄(東京)에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한영섭(韓永燮)이 1931년 1월 15일 사망한 뒤 같은 달 19일에 향리로 이송되자, 송건호(宋健浩) 등과 함께 ‘동지장(同志葬) 거행’에 대해 협의하였다. 같은 달 21일경 한윤섭(韓允燮)의 집에 모여 ‘추도(追悼) 적혁(赤革) 한영섭의 영(靈)’이라 쓴 깃발 8개 등 다수의 수십 개의 깃발을 제작하였다. 다음날인 22일 한영섭의 조부 한정권(韓程權)의 집에서 장례식이 거행될 때 이 조기(弔旗)들을 세워 추모했으며, 대걸리(大乬里) 공동묘지에 매장될 때 혁명가(革命歌)를 합창하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하였다. 여러 동지들과 30~50전씩을 갹출하여 앞면에는 ‘동지적광한영섭기념(同志赤光韓永燮記念)’, 뒷면에는 ‘차가운 백색(白色) 아래 억눌린 군집(群集)이여, 높이 울려 투쟁하여 피를 뿌린 동지였다’는 뜻의 문구를 새긴 석비(石碑)를 제작하여, 같은 해 3월 17일 마을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세웠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31년 3월 31일 제주경찰서(濟州警察署)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6일 동지들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고, 6월 18일 예심(豫審)이 종결되었다. 8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즉시 공소(控所)를 제기하였으나,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었다. 김천소년형무소(金泉少年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2월 5일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제주에서 사회운동을 계속하였다. 1934년 4월 상순경 김원근(金元根)·부생종(夫生鍾)의 지도 아래 함덕독서회(咸德讀書會)를 조직했다. 10월경까지 김태근(金泰根) 등과 함께 20회에 걸쳐 회합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9월과 10월에 함덕리 여자청년회에서 여자 야학과 여성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이상의 활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35년 1월 7일 기소유예(起訴猶豫)로 풀려났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31. 4. 9, 4. 12, 5. 12, 8. 5, 8. 11)
- 제주항일독립운동사(제주도, 1996) 225~226, 257, 372, 565~568, 642~7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