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2월 전남 (全南) 광양군 (光陽郡) 광양면 (光陽面) 도월리 (道月里) 에서 박경래 (朴坰來) 의 지도로 김희곤 (金希坤) , 강충실 (姜忠實) 등과 함께 사회주의 (社會主義) 사상 (思想) 학습 (學習) 을 위한 비밀 결사 (秘密結社) 를 조직하였고, 1933년 5월 1일에는 동면 (同面) 용인리 (龍仁里) 에서 김기문 (金基文) 등과 함께 혁명가 (革命歌) 등을 고창 하며 시위 운동 (示威運動) 을 하였다가 동년 (同年) 9·10월 경 체포 (逮捕) 되어 1935년 7월 19일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執行猶豫) 5년(미결구류 (未決拘留) 365일 통산 (通算) )을 받을 때까지 1년 9개월 (個月) 여 (餘) 의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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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26년 광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능생수산학교(能生水産學校)를 1년 동안 다니다가 귀국하였다.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있던 그는 1929년 6월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해 갔다.
그는 동생 김희곤(金希坤)과 함께 1931년 12월 광양군(光陽郡) 광양면(光陽面) 도월리(道月里)에서 박경래(朴坰來)의 지도로 전남적색농민조합(全南赤色農民組合)을 결성하고 조직적 항일운동을 펴나갔다. 동 조합은 새로운 단계의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구성원들은 사회과학 학습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길러 나갔다.
1933년 5월 1일 광양면 용인리에서 김기문(金基文) 등과 함께 혁명가 등을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 일로 인해 동년 9월 체포되어 1935년 7월 19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1년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光州地方法院, 1935. 7. 19)
- 東亞日報(1933. 10. 6, 1935. 7. 7)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朝鮮中央日報()1935. 7. 10·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