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기독교계 학교인 서울 배재중학교에 재학하면서 자유주의적인 교풍(校風)의 영향을 받고 민족의식을 키워가던 중 졸업 직전인 1942년 2월경부터 학우 김영헌(金永憲)·이원갑(李元甲)·김옥돈(金玉敦)·정준영(鄭俊永) 등과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종로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사진부에서 졸업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이들은 영원한 우정과 독립의 정신을 변치 말 것을 약속하였다.
동교를 졸업한 직후인 같은 해 4월 김영헌·김옥돈과 회합한 자리에서 김영헌이 자신은 이광수(李光洙)·이기영(李基永)·송영(宋影) 등의 지도를 받아 문학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민중을 지도해 갈 생각이라고 하자, 신낙현은 자신은 정치를 공부하여 민중을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1943년 3월 김영헌이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공부하고 돌아와 조선독립을 위해 조선 민중을 지도할 것이라는 뜻을 밝히자, 신낙현은 자신은 귀가 나빠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는 없지만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힘을 다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또 같은 해 10월 하순 김영헌·김옥돈·한정헌(韓楨憲) 등과 회합한 자리에서 자신이 읽었던 『네루전(傳)』을 인용하여, 우리도 인도의 네루처럼 조선독립을 위해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후에도 이들은 편지 등을 통해 서로 격려하며 독립 의지를 다져나갔다.
1944년 8월 초순경 서울 함평여관(咸平旅館)에서 김영헌과 회합한 자리에서 당시 일본 수상이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방하는 발언을 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 일본의 내각정보국(內閣情報局)이 도조내각(東條內閣) 총사직을 발표한 데 대해, “도조 수상은 사이판 섬에서의 일본군 전멸의 책임을 지고 사직한 것”이라고 비방했으며, 이에 대해 김영헌은 도조 수상은 언론을 압박하여 전 국민의 반감을 사서 사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1944년 8월 23일 동지들과 함께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에 체포되었다. 몇 개월의 취조를 거친 후 다른 동지들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신낙현과 김영헌은 검찰에 기소되었다. 1945년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구류(拘留) 29일(미결구류일수 중 50일을 징역형에, 29일을 구류형에 산입함)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45. 4. 18)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12집 1118~1122면
- 월간 야담(1988년 11월호) 3권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