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 7월 김춘수 (金春洙) 의병장 (義兵將) 의 종사 (從事) 로 임명 (任命) 되어 홍천 남창 (洪川南蒼) 여주 천양 (驪州川陽) 과 홍천 각길리 (洪川角吉里) 등지 (等地) 에서 왜적 (倭敵) 과 전투 (戰鬪) 하고 정대무 (丁大武) 의 선봉장 (先鋒將) 김응서 (金應西) 와 소모 (召募) 하는 전령문 (傳令文) 을 작성 (作成) 활동 (活動) 하였으며 곡수 (曲水) 에서 순사 (巡査) 김연상 (金年相) 을 살해 (殺害) 하는 등 활동 (活動) 하다 일 수비대 (日守備隊) 에 피체 (被逮) 되어 1908. 5월 유배 (流配) 10년형 (年刑) 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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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기 양평(楊平) 사람이다.
1907년 봄에 의병장 김춘수(金春洙)의 의진에 입진하여 종사(從事)로 임명되어 의병 200여명과 같이 동년 11월에는 홍천(洪川) 남창(南倉)에서, 12월에는 여주(驪州) 천양(川陽)과 홍천(洪川) 각길리(角吉里)에서 왜적과 전투하였다. 또한 정대무(丁大武)의 선봉장 김응서(金應西)와 황경평(黃耕坪)에서 소모하는 전령문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년 10월 24일 부하 의병 200여명을 인솔하여 지평(砥平)·양근(楊根)·홍천(洪川)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송면(大松面) 곡수(曲水)에서 일본 순사 김연상(金年相)을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에 일수비대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었다.
1908년 5월 22일에 평리원(平理院)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배 10년형을 받고 완도(莞島)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09·73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7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117·1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