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 (同志社大學) 예과생으로 수학하면서, 신간회 (新幹會) 재정부 총무간사, 재일본조선청년동맹원과 문화회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1928년 여름 방학시 귀국하여 재외영광유학생학우회 (在外靈光留學生學友會) 의 일원으로 전남 (全南) 영광 (靈光) 에서 민족의식을 고취 하는 순회강연을 하였다가 20일간 구류되었고, 조선민족의 해방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1929년 3월 1일 경 경도 (京都) 에서 인정식 (印貞植) 의 권유를 받고 고려공산청년회 (高麗共産靑年會) 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에 임명되었고, 1929년 6월 10일 경 경도시 (京都市) 좌경구 (左京區) 에서 경도 (京都) 제국대학 (帝國大學) 학생 김인이 (金麟伊) 에 대하여 고려공산청년회 (高麗共産靑年會) 의 가입을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9년 7월 경도 (京都) 에서 체포되어 1931년 5월 징역 2년을 받고, 3년여의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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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27年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생으로 수학하면서, 신간회(新幹會) 교토지회[京都支會] 재정부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또한 재일본조선청년동맹과 문화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여름방학 때 귀국하여 재외영광유학생학우회(在外靈光留學生學友會)의 일원으로 전남 영광(靈光)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순회강연을 하다가 20일간 구류된 일이 있었다.
1929년 3월 교토[京都]에서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동지 규합에 힘을 쏟다가 체포되어 1931년 5월 징역 2년을 받고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都地方裁判所, 1931. 5. 15)
- 東亞日報(1928. 8. 28, 1932. 8. 30)
- 고향의 시인들과 시인들의 고향(鄭종, 1995) 163∼1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집 404면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鄕脈(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78) 제2호 94∼97면, 1994. 5 제7호 135∼1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