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 12월 구한국군 (舊韓國軍) 참령 (參領) 으로 군대해산 (軍隊解散) 에 반대 (反對) 하여 활동 (活動) 하다 유형 (流刑) 10년을 받아 완도 (莞島) 에 유배중 (流配中) 탈출 (脫出) 하여 의병장 (義兵將) 강성택 (姜成宅) 과 합류 (合流) 하여 고금 (古今) , 청산 (靑山) 여호 (麗湖) 등지 (等地) 에서 왜군 (倭軍) 과 싸웠으며, 의병장 (義兵將) 이 되어 완도 (莞島) , 해남지방 (海南地方) 을 근거 (根據) 하여 일 수비대 (日守備隊) 와 수차 (數次) 에 걸쳐 전투 (戰鬪) 를 하고 일진회원 (一進會員) 과 일밀정 (日密偵) 을 총살 (銃殺) 하는 등 활약 (活躍) 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교수형 (絞首刑) 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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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전북 진안(鎭安) 사람이다. 1907년 대한제국군 참령(參領)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강제에 의해서 우리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대하여 항쟁하다가 붙잡혔다. 1908년 1월 28일에 소위 내란으로 유형 10년을 받고 전남 완도(莞島)에 유배중에 전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함을 듣고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강성택(姜成宅) 의병장의 부하 수십명과 함께 각각 총기로 무장하고 고금(古今)·청산(靑山)·여호(麗湖)의 여러 섬과 해남군(海南郡) 화이면(花二面)의 각 부락에서 활동하였다.1909년 7월 완도군(莞島郡) 북종면(北從面) 이진리(梨津里)에서 의병장 추기엽(秋琪燁)·황두일(黃斗一) 등에 의해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강성택(姜成宅)·추기엽(秋琪燁) 등을 부장으로 삼았다. 그는 의병진을 총과 창검으로 무장하게 하고 친일 일진회(一進會) 회원 박원재(朴元在)와 일헌병의 밀정인 진태진(陳泰鎭)을 총살하였다. 대둔사(大屯寺)·미황사(美黃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일수비대의 야습을 받고 패전하여 피신하여 있다가 1909년 10월 29일 완도수비대에 자수하였다. 1910년 2월 20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소위 폭동 및 모살(謀殺)로 교수형을 받아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0. 2. 26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 판결문(1910. 3. 19 대구공소원)
- 판결문(1910. 4. 22 고등법원)
- 완도군지 (1977. 6. 30 발행) 25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795·920∼925면
- 전라남도지 제1권 (1982. 11. 5 발행) 1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