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전남 고흥(高興) 사람이다.
1919년 3월 3일 전남 고흥군(高興郡) 고흥면(高興面)에 거주하는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입학을 위하여 서울에 가던 중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1매를 가지고 고향인 고흥(高興)에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동군(同郡) 남양면(南陽面) 신흥리(新興里)에 사는 예수교인(敎人) 이형숙(李亨淑)·손재곤(孫在坤)·최세진(崔世珍)·조병호(曺秉鎬)·이석완(李錫琬)에게 국제정세(國際情勢)와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 등을 역설(力說), 찬동을 받아 고흥읍 장날인 4월 14일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정하였다.
1919년 4월 7일 동지 오석주(吳錫柱)에게 태극기 80여매와 독립선언서 100여매를 제작케하는 한편 고흥읍과 강동면내(江東面內)의 예수교인에게 연락하여 동지규합을 부탁하고 동월 10일에는 동지 한익수(韓翊洙)에게 조선독립고흥단(朝鮮獨立高興團) 이름으로 자체선언서 10여매를 작성하도록 하여 거사일인 4월 14일 고흥 장터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심한 강우(降雨)로 인하여 시위를 못하고 고흥군수(高興郡守) 순천법원 지청장(順天法院支廳長)과 순천헌병분대(順天憲兵分隊) 감독보조원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였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1919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20년 8월 25일 고흥읍내 기독교 청년들의 발기로 고흥기독교청년회(高興基督敎靑年會)를 창립, 총회를 열고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조선청년회연합회에 가입하여 무학남녀 아동들의 계몽을 위하여 야학회를 설치하고 한글, 한문, 산술 등을 가르쳤다.
1923년 2월 26일 고흥기독교청년회(高興基督敎靑年會) 주관으로 조선물산 사용을 장려하고 조선산 의복을 입게 하며 토산품 사용과 단연실행(斷煙實行)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19일 배일사상(排日思想)의 고취를 위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전도하면서 교회건립 확장과 찬조금 460여원(圓)을 모집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6. 13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 판결문(1919. 7. 25 대구복심법원)
- 판결문(1919. 10. 2 고등법원)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93면
- 3·1운동실록(이용락) 533면
- 사천목씨가승(고흥일가편, 1968년 여름) 27면
- 고흥군사(고흥군사편찬위원회, 1961. 7. 20) 231면
- 고흥군지(권지2) (고흥군, 1966년판) 의사편 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4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486면
- 동아일보(1920. 9. 19, 1921. 7. 20, 1923. 3. 4, 1925. 4. 24)
- 사천목씨세보(권지중)(종친회, 1988. 5월) 455·45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59·60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