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오치섭은 평남 대동에서 오한억(吳漢檍)의 장남으로 태어나 8세 때부터 16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922년 3월 남형제산(南兄弟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4월 진남포공립상공학교(鎭南浦公立商工學校)에 입학하여 1924년 4월 3학년 때 퇴학하고, 그해 6월 경성의 사립중등학교 4학년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 2월 퇴학하고 귀향하였다. 귀향 이후 오치섭은 일본 유학에 뜻을 두고 1925년 4월 동경으로 가서 행상을 하면서 고학을 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재동경무정부주의단체(在東京無政府主義團體)인 흑풍회(黑風會) 회원인 평남 중화 출신의 이홍근(李弘根)의 지도를 받아 무정부주의자 대삼영(大杉榮)의 저서를 탐독하게 되었다. 그후 1926년 10월 이홍근의 소개로 흑풍회에 가입하여 무정부주의운동을 하게 되었다. 1927년 7월 귀국한 오치섭은 관서(關西)지방 무정부주의자들인 최갑룡(崔甲龍)과 이홍근(李宖根) 등이 결성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에 참여하게 되었다. 관서흑우회는 "우리는 자유연합주의적 기치하에 노동계급의 해방을 기한다", "우리는 직업적 운동자와 강권주의자를 적극적으로 배격한다"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으며, "우리는 중앙집권주의와 강권주의를 배격하고 자유연합주의를 강조한다", "우리는 빈천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기한다", "우리는 유상무상(有像無像)의 우상숭배를 배격한다" 등을 강령으로 결정하는 등 오치섭은 관서흑우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오치섭은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였으며, 1930년 1월 13일 동흥노동동맹 지부(芝部) 및 신전부(神田部) 각부 5명과 함께 친일 단체인 상애회(相愛會)를 습격하여 간부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로 말미암아 오치섭과 동지인 곽한정(郭漢丁), 김제보(金濟保) 등은 일경에 검거되어 그해 3월 22일 동경지방재판소(東京地方裁判所)에서 징역 10월을 받고 풍다마형무소(豊多摩刑務所)에서 복역하다가 1931년 1월 22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출소 후에도 오치섭은 흑우연맹을 지도하면서 기관지 흑색신문(黑色新聞)으로 동경의 한인 무정부주의단체인 자유청년연맹(自由靑年聯盟),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 조선자유노동자조합(朝鮮自由勞動者組合), 극동조합(極東組合),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 등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하였다. 그후 1931년 7월 중국에서 발생한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조선동흥노동동맹 신전부(神田部)에서 한인 무정부주의자들과 협의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때 오치섭이 중심이 된 한인 무정부주의자들은 격문 약 3천매를 인쇄하여 동경시내에서 살포하고 피신하였으나, 그해 8월 초 서신전(西神田)경찰서에 검거되어 구류에 처해졌다. 오치섭은 1932년 7월 동경에서 신호(神戶)로 옮겨 활동하다가 신호 임전(林田)경찰서에 검거되어 그해 9월 7일 신호지방재판소(神戶地方裁判所) 검사국에서 귀국을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귀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31. 2. 21)
- 무정부주의자의 행동에 관한 건(1932. 10. 4) 思想에 관한 情報(5)
- 朝鮮出版物押收目錄(1934. 2. 17)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집 111~112면
- 中外日報(1928. 5. 2)
- 中外日報(1927.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