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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9월 11일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용산면(蓉山面) 모산리(茅山里)에서 태어났다.
1933년 5월경 전남 완도(莞島)·해남(海南)을 중심으로 장흥·강진(康津)·영암(靈巖) 등지를 연계해 조직한 비밀결사 사회주의운동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되었는데 이에 가입하였다. 사회주의운동전남운동협의회는 전남 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지식인을 포함한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하여, 산하에 사무부·조직부·조사부·구원부(救援部)를 두었으며, 기관지 『농민투쟁』을 발간하였다. 또한 ‘영농회사의 토지겸병 반대, 양반 기타 봉건사상과 지방열(地方熱) 배격, 소작료 감하 및 전정(全定) 요구, 면화·김海苔 등의 가격 인상 요구, 호세(戶稅) 인하 요구, 간상(奸商) 배격’ 등 실제 농민의 경제생활과 밀접히 관련된 구호를 내걸고 활동하였다.
1933년 8월 중순경 유재성(劉載星)·길인주(吉寅柱)·정진수(丁瑨壽)·김두환(金斗煥)·고희석(高喜錫)·왕재일(王在一) 등 1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장흥지방의 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어 서로 연락이나 통제가 되지 않다는 점을 반성하고, 그 지도기관을 결성하기로 협의하였다. 그해 10월 12일경 강진군(康津郡)의 윤가현(尹珂鉉)·마성만(馬成萬)으로부터 장흥적색농민조합(長興赤色農民組合)의 결성을 권유받자, 11월 중순경 김두환의 권유로 함께 장흥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각 부락에서 2~5명을 단위로 반(班)조직을 결성하기로 하고, 각자가 청년반, 농민반, 소년반 등을 결성하고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비밀결사 장흥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남면(南面) 계산리 지역을 담당하여 세포반(細胞班)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11월 27일 계산리 자택에서 김한승(金漢昇) 등 3명과 함께 청년반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1934년 2월 사회주의운동 전남운동협의회의 주요 간부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6개월 동안 전라남도경찰부 고등과의 지휘로 장흥을 비롯해 완도·강진, 해남·장흥·영암·목포·보성·진도·순천·여수 등 9개 군에서 사회주의운동전남운동협의회 산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의 관련자 558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 관련자만 3,0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할 정도로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1934년 2월 중순경 체포되었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담당검사가 항소하여 1937년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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