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그는 한말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장남으로서 구한말에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와 승정원(承政院)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하였고, 1913년 9월 임병찬이 주도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할 때 서울에 올라와 광무황제(高宗)의 밀조를 가져오는 등 의병 기의(起義)에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그후 부친인 임병찬이 거문도(巨文島)에서 유배생활 중 1916년에 순국하자 망부(亡父)의 뜻을 계승하여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19년 9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말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은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활발한 조직활동을 벌였다.
동단 가입후 그는 먼저 그의 아들 임수명(林守明)과 숙부 임병대(林炳大)를 가입시켰고, 또 전주(全州)의 이병우(李炳祐), 남원(南原)의 강경진(姜景鎭)·형갑수(邢甲壽) 등을 포섭하면서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支團)은 지단장에 임응철, 부단장에 이병우, 이사(理事)에 임수명 등이 선임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그는 대동단 본부가 있는 서울을 수차 왕래하며 자금조달 등의 지원활동을 폈는데, 동년 11월 대동단에서 본부의 상행(上海) 이전계획과 함께 추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부분의 대동단 인사들이 붙잡혔고, 그도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처음엔 증거불충분으로 일단 풀려 나왔으나 그후 그의 활동이 밝혀지면서 다시 붙잡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0. 4. 7 대구복심법원)
- 고등경찰요사 17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2권 40·25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50·25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0·91·13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18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