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이조헌은 1900년 7월 12일 경기도(京畿道) 진위군(振威郡) 송탄면(松炭面) 지산리(芝山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수송(秀松)이다. 중국으로 유학을 가 북경대학(北京大學)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북경대학 재학 당시 북경조선유학생회(北京朝鮮留學生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북경조선유학생회는 1918년 3월 북경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유학생 3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단체였다. 김성숙(金星淑)·신용주(愼鏞周) 등이 1924년 2월경 북경조선유학생구락부(北京朝鮮留學生俱樂部)를 조직하였다. 북경조선유학생구락부는 1925년 1월 제9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명칭을 북경고려유학생회로 변경하였다.
1924년 2월 원세훈(元世勳)이 연해주에서 임시정부를 만들려다가 소비에트 러시아정부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북경에 돌아와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원세훈은 민족유일당 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 가야하는 데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같은 함경도 출신인 서왈보에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고, 서왈보는 가장 믿을 만한 동지인 이조헌을 소개시켜 주었다. 1924년 7월 이조헌은 원세훈과 같이 상하이에 갔다가 베이징으로 왔다.
1924년 7월 중국당국은 베이징에서 고주석강도사건(高周錫强盜事件)으로 체포된 김세준(金世晙)의 석방문제와 관련하여 한인단체에게 신원보증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조헌·한진산(韓震山)·원세훈 등 북경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하였다. 1925년 3월 1일 북경한교동지회 회원들은 ‘앞잡이(導報社)’를 설립하고, 『앞잡이(導報)』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3월 7일 조선기독교회에서 재류선인유지대회(在留鮮人有志大會)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조헌을 비롯하여 모두 17명이 참석하였다. 6월 6일 이조헌이 소속된 북경의 한교동지회와 도보사 두 단체의 간부 12명이 한진산의 집에서 모여 국민대회에서 전단을 작성하여 살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6년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자는 연설을 했다. 안창호는 베이징을 방문하여 원세훈과 민족유일당 조직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후 원세훈은 민족유일당 결성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했다. 서울에 있던 이조헌은 1926년 10월 2일 그에게 250원을 송금하여 민족유일당 결성을 지원했다. 이조헌이 보내준 자금으로 원세훈은 송호(宋虎)와 황일산(黃一山)과 함께 러시아로 가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으려고 하였다. 10월 10일부터 3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10월 28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가 성립될 수 있었다. 북경촉성회가 성립되면서 북경의 북경조선유학생회와 북경고려유학생회도 민족단일전선의 결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었다. 1926년 11월 28일 평민대학(平民大學)에 모여 기존의 두 단체를 폐지하고 한국유학생회를 창설하였다.
이조헌은 북경에서 귀국하여 고향인 진위로 돌아왔다. 1927년 6월 12일 친목과 계몽을 위한 진위구락부(振威俱樂部)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933년 8월 24일 경성의전병원(京城醫專病院)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3. 8. 26)
-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북경찰부, 1934) 109~1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