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전해산(全海山) 의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1909년 7월부터 9월 경까지 전남 함평·영광 등지에서 이강산(李江山)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장봉은 이강산이 망국의 상황에서 1909년 7월 의병을 일으키기로 뜻을 세우고 함평군 대야면에서 동지를 모집하자 서성학·정인술·박치일·양창국 등과 이강산의 뜻에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강산은 일찍이 의병전선에 참전하여 명성을 날렸던 김준(金準 : 金泰元) 의진을 계승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김준이 1908년 봄 일본군과 교전 끝에 순국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박장봉은 이강산과 함께 1909년 8월 29일 함평 등지에서 적과 교전한 후 나주 헌병 분견소 구밀파견소의 밀정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박복남(朴福男)이 그곳 이양삼(李良三)의 집에 온 것을 탐지하고 이들을 처단하였다. 이들은 평소에 의병활동을 방해해오던 인물로서 반민족분자로 지목되어 있었다. 이강산은 이들이 주막에 모여 있는 것을 탐지하고 박장봉을 비롯하여 박치일·정인술·서성학 외 2인에게 작전을 지시하였고, 이들이 주막에 이르렀을 때, 마침 양창국(梁昌國)과 박병수(朴丙洙)가 그 곳에 와 있었으므로 이들도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일치된 8사람이 협력하여 이판안·김정태·최치도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박복남을 산중으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다. 박장봉은 이러한 일련의 활동이 적에게 탐지되어 붙잡혔으며, 1909년 12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모살(謀殺)죄로 교수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0년 6월 2일 마침내 형이 집행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846∼9面
- 機密統發 第1117號(1910. 5. 28)
- 大韓每日申報(1910. 6. 9)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2輯 498面
- 判決文(고등형사부, 1910.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