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월 신간회 전주지회 간사 및 선전부장, 동년 9월 전주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1930년 전주합동노동조합 상무서기로, 동년 6월 『전북일보』 일본인 기자의 모욕적 기사 게재에 대한 신간회 본부의 지시로 진상 조사에 참여하였으며, 8월 비밀결사 지방 야체이카 조직 관련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됨.
1931년 3월부터 4월까지 전북 전주지역 정미소 동맹파업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구류 25일 처분을 받았고, 동년 7월 경북 대구에서 노동, 농민조합을 조직한 후 『코뮤니스트와 봉화』를 발간하고 배포, 9월 국제청년무산데이 활동, 1932년 2월 비밀결사 재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며, 동년 5월 비밀결사 재건협의회 결성 전북 대표로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6년 6월 김문옥은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全州) 태극기 게양사건으로 체포됐다가 무죄 방면됐다. 이후 1928년 1월경 전주의 신문배달조합(新聞配達組合), 직공조합(職工組合), 인쇄직공조합(印刷職工組合), 정미인부조합(精米人夫組合), 고용조합(雇傭組合), 철공조합(鐵工組合) 등 직업별 조합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준비위원으로서 1월 5일 전주합동노동조합(全州合同勞動組合)을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같은 조합의 조합원 겸 상무서기로 선출됐다. 4월에는 전주청년동맹대회(全州靑年同盟大會)에서 도연맹 출석 대표로 뽑혔으며, 이어 7월에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전주연맹대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한편 신간회(新幹會) 전주지회에 참여해 1929년 1월에는 신간회 전주지회 간사 및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6월에는 전주청년동맹 서무와 재정부장을 맡고 9월 전주청년동맹 집행위원이 됐다.
1930년 1월 전주합동노동조합 상무서기로 선출된 동시에 정치문화부를 담당했다. 이후 전주합동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서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운동을 준비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전북일보(全北日報)』의 일본인 기자가 “너희들에게는 동물 대우를 해도 당연하다”, “몇 번이나 때려죽이려고 하였다” 등의 한국인을 모욕한 기사를 게재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신간회 본부의 지시 하에 진상조사에 참여했다. 동시에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야체이카 조직에 참여했다가 8월에 체포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31년 3월부터 4월까지는 전주지역 동맹파업을 지원 활동을 했으며, 5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재건 전주지구위원회에 참여했다. 이어 7월 대구(大邱)에서 개최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 전국대회에 전라북도 대표로 참석했다. 7월 25일에는 대구 이상조(李相祚)의 집에 머물면서 권대형(權大衡) 등 공산주의자들과 만나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출판물을 발행하기로 협의했다. 이에 같은 해 11월에 잡지 『코뮤니스트와 봉화(烽火)』 1931년 9월호 15부와 10월호 18부를 입수해 비밀리에 발행, 배포했다. 같은 해 9월 국제무산청년데이를 앞두고 일제의 사전 검거에 의해 체포됐다 풀려났다.
김문옥은 1932년 2월 공산주의 비밀결사 재건 활동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비밀결사 재건협의회 결성에 전라북도 대표로 참석해 다시 체포됐다.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출판법(出版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공소를 제기했으나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형이 확정됐다. 이후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5년 6월 28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전주지방법원:1934. 3. 31)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4집 13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