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오유환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에 반대하는 항일운동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1941년 6월 일본 동경의 정지두공원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김규엽(金圭燁)을 만나 그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규엽은 오유환에게 “현재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정책상의 호성(呼聲)에 지나지 않고 내선인 평등의 대우는 도저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지원병을 식민지의 토민병(土民兵)으로 사역시키려 하는 것이다. 또 조선인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나 본적지를 내지(內地)로 옮길 수는 없다. 이민족의 융합이 곤란하다는 것은 역사상 명백하다. 고로 우리는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지몽매한 농민대중을 계몽하고 그것을 민족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급무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오유환은 김규엽의 주장에 동조하고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후 1941년 10월에도 김규엽은 오유환에게 “여름 방학에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 농촌의 실정을 보니 일반 농민은 무지몽매하여 매우 피폐하다.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써 장래 조선에 돌아가 서로 제휴하여 조선 민족의 계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되고자 전문부 졸업후는 대학부에 진학하여 면학하고 먼저 자기완성에 힘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유환은 “나도 장래 취직 후 서로 제휴하여 조선민족의 계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16일 오유환의 하숙집에서 김규엽은 “일본은 5년간이나 중국과 전쟁하여 상당히 피폐하여 있고, 지금 또 세계의 최대 강국인 미·영과 개전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패전할 것이다. 이번 가을이 곧 우리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절호의 기회이다. 나는 근일 조선으로 돌아가 경성방면에 취직하여 지방의 동지와 암호 전보로 비밀리 연락을 하고 독립운동을 실행할 각오이다. 군도 크게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공감한 오유환은 “일본이 아무리 무력이 강하다고 해도 세계의 최대강국인 미·영을 상대로 싸운다면 경제적으로 파탄을 초래하여 결국 패전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제휴하여 독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여 그 실행 방법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같은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검거된 오유환은 1943년 4월 2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육군형법위반,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全州地方法院:1943.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