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본관은 전주이며,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이다.
청빈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1895년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본 낭인들에 의해 자행되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었으며, 1907년 황제 폐위 및 군대 해산이 모두 일제의 내정간섭에 의한 것임을 알고 광산·나주 등지에서 대중에게 나라가 위태로움을 역설하여 800명의 의병을 규합하였다. 스스로 의병장이 된 이기손은 의병을 이끌고 진도(珍島)·완도(莞島) 연안의 왜적을 격퇴시켰다.
이어서 장성(長城)의 기삼연(奇參衍) 의진의 부장 전해산(全海山)·김죽봉(金竹峰 : 金準)과 상의하여 호남의 서부지방 즉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었다.
일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으로 의병의 무장을 마친 이기손은 본격적인 의병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龍鎭山) 전투에서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총 백여 정을 노획하였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병을 사살하였다.
그후 용진산보다 지형이 좋고 군량미 조달이 용이한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潭陽) 등지로 원정하여 왜장 길전(吉田)를 사살하고 적병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본진인 성문산을 포위 공격해 들어오는 적과 대적하여 수십 명에 이르는 적을 사살하였다.
전남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하기 위하여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군을 완전 섬멸하였다.
또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고창(高敞) 극오동과 노동작전에서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각오로 임전태세를 완비하였으나, 1908년 이후 병력과 장비를 증강시킨 적의 의병 토벌대와 접전하기에는 중과부적이므로 부득이 의병을 해산시켰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전한 후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적에게 체포당하였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錦山)에 은신하였다. 그후 함경도를 거쳐 만주, 그리고 노령 연해주 지방까지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그의 가족은 적의 모진 탄압과 고문을 감내 해야만 했다. 가족 중 2남은 옥고로 인하여 사망했고 부인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1915년 노령으로부터 돌아온 뒤에는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교육하였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건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6면
- 독립운동공훈사 790·7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49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