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정운경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후예로 충청북도 제천(堤川) 출신이다.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거의하여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 의진에 참가하여 1896년 1월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고, 청풍(淸風)·평창(平昌) 등지에서 적당수령(賊 首領)을 참수하여 전공을 세웠다.
3월에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이 사임하면서 정운경을 천거함에 따라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원주 대평교(大平橋)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의진은 일단 해산되었다.
1896년 9월 의병장 의암이 정운경을 비롯한 부하 70명을 거느리고 만주로 가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고 귀국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적어 북유건연(北遊巾衍)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조약 무효를 부르짖으며 거의한 원용팔(元容八)이 9월에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되었으며 박정수(朴貞洙)의 거의도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양(丹陽)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의거의 깃발을 올리고 군사를 모으니 수일간에 단양·제천·영춘·청풍의 4군 일대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며 삼사백 명의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정운경은 의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원주 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그리고 함께 거의하였던 의당 박정수(義堂 朴貞洙)는 청풍에서 각각 체포되니 의진은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군부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5년 11월 평리원(平理院)의 재판을 거쳐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1906년 10월 황주 철도(黃州 鐵島)로 유배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271·338·3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574·57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