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태극학회(太極學會)와 신민회(新民會), 양산학교(楊山學校) 등을 통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4년 숭실학교를 차이석(車利錫)·노경오(盧敬五) 등과 함께 제1회로 졸업한 후 일본 동경사범학교로 유학하여 태극학회(太極學會) 회장을 지냈으며, 1906년 귀국한 뒤에는 평양의 숭실학교와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 의주(義州) 양실학교(養實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7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 평안도 지부를 맡았던 그는 차이석·변인서(邊麟瑞)·장응진(張膺震) 등을 신민회에 가입시키는 등 회원 모집과 회의 운영에 깊게 관여하였다. 1908년에는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의 이름으로 양산학교(楊山學校)에서 구국교육운동의 일환으로 하기사범상습소(夏期師範講習所)를 개설하면서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국어학에도 조예가 깊어 1908년에 국문법 저술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저술간행하기도 했던 그는 1909년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황해도 안악에서 지방 유지들과 뜻을 모아 베짜는 기계를 서울에서 들여와 광목 생산의 향상을 돕는가 하면 연초제조기를 들여와 담배를 생산하여 일본 상품과 경쟁케 하였다. 1909년 10월에 그는 신민회의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의 계획에 따라 김용제(金庸濟)·최명식(崔明植) 등과 함께 서간도(西間島)에 농장 경영을 위한 현지 답사를 계획하여 최명식이 1차 답사한 바 있었으며, 안동현(安東縣)에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무역상을 설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렇듯 교육계몽운동과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 등 폭넓은 독립운동의 구도 아래 활동을 전개하던 중 황해도 배천읍(白川邑)에서 교육계몽 강연을 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1910년 7월에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백범일지(필사본) 7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215·2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555·9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655·657-659·661·664·9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