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19년 1월 26일 서울의 중앙기독청년회(中央基督靑年會) 간사 박희도(朴熙道)가 서울의 전문학교생 이상의 대표 8명을 초대한 자리에 갔다. 주익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졸업생 자격으로 참석했다. 회합을 마친 뒤 “대전(大戰) 결과 세계는 새로 조직하게 되어 (중략) 종래에는 속국(屬國)이었던 것이 독립하고, 또는 타국 판도 내에 있던 민족으로 새로 독립국가를 조직하는 국가가 수개 국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 조선에 대해서도 강화회의에서 문제시되는 기미가 있으므로 이때 우리 동포가 일제히 궐기해서 운동을 개시하면 혹은 성공할지도 모르는 정세다. 그리고 지금 이 기회는 운동을 개시할 호시기(好時期)라 사료된다.”고 설파했다. 이에 박희도 등 다수의 찬성을 얻었다.
2월 10일경까지 김원벽(金元璧) 등과 여러 차례 만나 학생층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고,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발표하기로 했다. 20일경까지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2월 22일경 이승훈(李昇薰)과 박희도의 교섭이 성립되었다. 김원벽은 즉시 승동예배당(勝洞禮拜堂)에서 원고를 소각했다.
3.1운동 이후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이라는 8매의 문서 원고를 작성하였다. 4월 13일 서울 와룡동(臥龍洞) 서정기(徐廷基)의 집에서 이 문서를 인쇄하고 서울시내 곳곳에 배부하였다. 23일 서울에 배포된 「임시정부선포문(臨時政府宣布文)」,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趣旨書)」, 「선포문(宣布文)」에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漢城政府)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에 이름을 올렸다. 8월 24일 최현(崔鉉)에게 「대한청년외교단중앙부(大韓靑年外交團中央部) 발(發) 국치기념경고문(國恥記念警告文)」이라는 문서를 배포하였다. 29일 전영희(全永禧) 등 학생들이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에 체포될 때 검거를 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1922년 5월 9일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3년 3월 말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을 맡았다. 함경북도(咸鏡北道) 선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4월 말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이사로 선정되었다.
1926년 9월 25일 함경남도 북청군의 북청고등보통학교기성회(北靑高等普通學校期成會)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1일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 3일 신간회(新幹會) 북청지회(北靑支會) 설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8일 간사회에서 회원 모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5월 26일 북청(北靑), 이원(利原), 단천(端川) 등 3군 지회의 대표 수십 명이 회합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복대표(複代表) 후보로 선정되었다. 6월 서울에서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가 주최한 ‘신간회 대표위원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29일에 열린 신간회 대표위원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정되었다. 8월 10일 신간회 북청지회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2월 24일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순국(殉國)한 신채호(申采浩)의 유해가 남대문역(南大門驛)에 도착했다. 고향인 청주(淸州)로 향할 때 남대문역 앞에서 출영(出迎)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19. 7. 21.)
- 동아일보(東亞日報)(1922. 5. 11, 6. 1, 6. 11, 6. 15~16, 6. 20, 6. 28~29, 1923. 4. 1, 5. 2, 5. 17, 1926. 9. 30, 11. 3, 1927. 4. 14, 7. 8, 12. 22, 1928. 1. 20, 1929. 1. 13, 1. 25, 5. 30, 8. 17, 1930.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