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31년 4월경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龍源面) 중호리(中湖里)에서 조양환(曺陽煥)의 권유로 홍원농민조합에 가입하여 용원지부(龍源支部)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홍원농민조합은 1927년 12월 1일 조직된 홍원노동야학원(洪原勞動夜學院)을 표면단체로 하여 합법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실제로는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한 조직이었다. 정염수(鄭濂守)의 지휘 아래 1931년 8월 16일 용원면 중동리(中洞里) 동대천(東大川) 모래밭에서 약 50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용원지부대회(龍源支部大會)를 개최하고 제반 사항을 논의하였다.
다음날인 8월 17일부터 28일 사이에 여러 차례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8월 31일까지 용원면(龍源面) 내의 관계부책(關係簿冊)·채권증서(債權證書) 등의 문서를 모두 소각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 각 반(班)에 책임자 1명을 두어 모든 실행을 일임하기로 하고, 만약 경찰서에 검거되면 모두 책임자의 협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실행한 것이라고 진술함으로써 희생자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농민조합 전체로 검거가 파급되는 것을 방지하고, 실행일까지는 면 내 문서부책(文書簿冊)의 보관을 조사해둘 것 등을 결정하였다.
홍원농민조합 용원지부 포항반(浦項班)을 이끌었던 조익환은 중호리의 문서 소각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1년 8월 30일 서순석(徐舜錫)의 집에서 서흥석(徐興錫) 등 다수의 반원들을 모아 채권문서류(債權文書類)의 징발은 예정보다 하루 앞서 당일 밤에 결행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고 그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날 밤 약 30명의 반원을 이끌고 중호리 최중남(崔仲南)의 집 등을 순차로 습격하여 실행의 취지를 알리고 계(稧) 등의 문서를 즉시 제공하라고 요구하였다. 최중남으로부터 금전대차부 1책, 서정환(徐廷煥)으로부터 장부(帳簿) 1책, 홍석표(洪錫杓)로부터 원호리(元湖里) 등록기 1책을 교부받아 이를 소각하였다. 그리고 다수를 집합시킬 것을 요구하는 등 소요(騷擾)를 지휘하였다. 다음날인 8월 31일에도 서순석·서흥석·서하원·조영응과 함께 반원 40명을 이끌고 중호리 서정률(徐廷律)의 집에 들어가 장부책과 서류 등을 소각하였다. 홍원 일대에서 동시에 진행된 이 사건은 당시 ‘홍원농민 데모사건’, ‘홍원농민조합원 항쟁사건’ 등으로 불리었다.
이와 같이 홍원농민조합 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4년 2월 6일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 4년(미결통산 360일)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控訴)를 제기했으나, 같은 해 8월 13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폐결핵 등 병세가 위독해져서 1935년 2월 27일 ‘복역불능(服役不能)’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같은 해 3월 3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34. 8. 13)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34. 2. 7, 1935. 3. 1)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4. 2. 8)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257면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1993) 별집 제8집, 1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