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28년 8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餘閑面)에서 박봉수(朴鳳樹) 등과 함께 신간회 철산지회를 발기하였다. 18일에 열릴 설립대회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14일 정치언(鄭致彦)의 기초 아래 「신간회 철산지회 설립 취지문」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했다. 17일 동지들과 함께 이 취지문 약 200매를 인쇄했다. 19일 철산군 참면(站面) 유정동(柳停洞) 차련관유치원(車輦館幼稚園)에서 개최된 설립대회에서 일본 경찰의 압수로 배포하지 못했다.
장문으로 작성된 취지문에는 “우리 2천만 동포 및 3천리 강산이 주인을 잃은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우리는 그간 무한한 압박과 착취를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털끝만치의 자유도 없었다. 우리는 토지 및 자유를 빼앗기고 추위와 배고픔과 압박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일본 혹은 남북만주로 유랑하였지만 조선인인 우리는 이르는 곳에서 구축, 압박, 박해, 멸시를 받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교묘한 착취와 무리한 압박은 점점 심해졌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이 착취와 압박이 점점 심해짐에 따라 우리의 반항열도 더욱 높아만 갈 뿐이고, 기미운동(己未運動) 이래 우리의 반항운동은 점점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중략) 우리의 사활을 결정할 이 침통한 대중적 요구를 실현하는 것은 민족적 단일 세력으로 결성과정에 있는 우리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실로 우리 조선에서 모든 갱생의 희망을 품고 가까운 장래에 위대한 날을 민족의 앞에 약속하였으며, 비장한 결의로 험난한 정치전야(政治戰野)의 장도(狀途)에 선 것이다.”라고 하여 독립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았다.
철산경찰서(鐵山警察署)에서는 이 취지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정상윤을 포함해 다수를 체포하였다. 1929년 5월 예심(豫審)이 종결되었다. 11월 1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불복해 즉시 공소(控所)를 제기했다. 1930년 4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검사 측에서 상고(上告)를 제기하여 출옥하지 못했다. 5월 5일 박봉수를 제외한 8명은 보석으로 출옥했다. 7월 21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1932년 5월 5일 정석행(鄭碩行)·정국용(鄭國用) 등 2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또 다시 철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반제동맹(反帝同盟) 결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고문 취조를 당한 뒤 ‘무죄(無罪)’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8. 8. 16, 1929. 5. 9, 12. 11, 1932. 5. 9)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30.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