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월 강서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혀서 악형(惡刑)을 당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에서 방면되었다. 그럼에도 이후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평양(平壤)에서 기독교 감리교파와 북장로교파에서 각각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자, 같은 해 8월 박세환(朴世煥)의 권유로 감리교파 애국부인회 증산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 활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11월 상순경 평양부(平壤府) 신양리(新陽里) 김경희(金景喜)의 집에서 위의 두 단체가 연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된 후에도 계속 증산지회장을 맡아 군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연락원에게 전달하는 등으로 활동하였다.
원래 북장로교파와 감리교파 모두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항일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 김정목(金貞穆)과 김순일(金淳一)을 국내로 파견하여 두 단체의 연합을 촉구한 결과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각 지부는 독립성이 강하여 사실상 대한애국부인회는 서북지방 애국부인회의 협의체적 성격을 띠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주요 목표 역시 독립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1920년 4~5월 이래 각 회원과 동지들로부터 금반지나 은반지 등도 포함하여 군자금 2,400여 원을 모집하여, 이 가운데 2,100여 원을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나머지는 경비로 사용하였다. 또한 애국부인회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군이 파견되면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살해한다는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송성겸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 겸 증산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0년 8월경 동지들과 함께 강서경찰서(江西警察署)에 체포되었다. 당시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만 100여 명이었다. 같은 해 10월 15일 검찰로 송치되어, 1921년 1월경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진남포지청(鎭南浦支廳)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창신학교(彰新學校)에 기부금을 내고 증산엡윗청년회 주최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매일신보(每日申報)(1920. 11. 7, 11. 14, 1921. 2. 27)
- 독립신문(獨立新聞)(1921. 2. 17)
- 신한민보(新韓民報)(1921. 4. 14)
- 동아일보(東亞日報)(1925. 1. 11, 5. 6, 5. 16, 1935. 7. 5)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4집 409, 433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0권 863~8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