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남 청양(靑陽) 사람이다.
안병림은 홍주(洪州)의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안창식(安昌植)의 아들이며, 병찬(炳瓚)의 아우이다.
본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유(文成公 裕)의 후예로서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 성장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부친과 형은 일찍이 을미 홍주의진의 중추적 인물이 되어 활약하고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이어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부친은 사망한 뒤여서, 형 병찬이 홀로 의거를 일으켰으나, 1906년 2월 23일 패전하여 체포되었다가 4월 12일에야 석방되었다.
석방을 전후하여 홍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의 의진이 형성되었다. 민종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형 병찬은 참모(參謀), 병림은 참모사(參謀士)가 되어 형을 보좌하였다.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천(舒川)을 향해 가서 양총(洋銃) 20자루를 빼앗아 가지고 남포(藍浦)를 지나 3일을 유진(留陣)하면서 적군과 한차례 교전을 하였다.
이어서 보령(保寧)을 지나 홍주(洪州)로 달려갔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다시 근처 삼신당리(三神堂里)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한 차례 격전을 벌여 왜병을 쫓고 4월 26일 입성하였다.
이 전투에서 안병림은 돌격장(突擊將)이 되어 남계원(南啓元)·곽한일(郭漢一) 등과 함께 공을 세웠다.
의진이 홍주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성내의 일진회원의 음모로 동문(東門)이 무너지고 피아간의 접전 끝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지만, 의진의 탄환이 다 떨어져 결국 성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백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안병림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적군은 의병장 민종식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수색하는데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종식과 이남규(李南珪)·이용규(李容珪) 등은 청양(淸陽)·예산(禮山) 일대에서 끊임없이 활약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약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적군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민종식을 위시하여 곽한일(郭漢一)·김덕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이세영(李世永) 등과 같이 안병림(安秉琳)도 체포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민문(閔門)의 일원으로 고종의 특지에 따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안병림은 9개월 만에야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그 동안 한성에 구금되었었는데, 찬방에서 거처하다가 병을 얻어 거의 폐인이 될 뻔하였다.
1907년 10월 1일에 다시 형 병찬 외 3인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부(公州府)로 압송 심문 받았다. 일인 순사 공팔(公八)의 모략 때문이었다.
출옥 후에도 형 안병찬을 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삼부자가 모두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 기려수필 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04·317·331·332·333·3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