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영동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광도(廣島)로 건너가 노동에 종사한 뒤 귀국하여 1926년 영동군 황간청년회(黃澗靑年會)에 가입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청년회 활동 중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여 항일 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세우고, 1929년 4월 26일 영동노동청년회를 영동농민조합(永同農民組合)으로 발전적으로 개편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30년 3월 개최된 제2회 정기총회에서 농민조합의 자체발전과 운동을 확대하기로 결의하고 조직을 개편할 때 손순흥은 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동 방침에 따라 그는 영동농민조합의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아 1930년 5월 영동농민조합 황간지부(黃澗支部)를 설치하였다.
이어 1931년 4월 농민조합 정기대회를 개최하면서 6백여 명 조합원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표면으로는 합법적 농민단체로 위장하면서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황간지부원 김순화(金順化)·박개천(朴開天)·박기철(朴基喆)·방영준(方英俊)·김완수(金完洙)·박찬영(朴燦榮) 등 10여 명을 비밀결사의 요원으로 포섭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적우동맹(赤友同盟)을 조직하였는데, 이 때 그는 선전조직부의 일을 맡았다. 적우동맹은 일제 식민지통치를 전면 부정하고 지하 조직을 통한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소작쟁의·동맹파업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 중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34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4. 7. 20 경성복심법원)
- 조선일보(1928. 2. 4, 1931. 3. 5, 1931. 4. 10, 1932. 12. 31, 1933. 6. 15, 1934. 7. 7, 7. 10, 7. 21)
- 동아일보(1932. 8. 5, 1933. 5. 26, 1934. 5. 8)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869∼893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