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32년 3월 서울의 사립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졸업할 때까지 사회주의 관련 사상 학습을 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경주군으로 내려와 이칠성(李七星)·손봉호(孫鳳鎬) 등과 함께 소작농(小作農) 및 무산(無産) 청소년을 규합하여 야학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토대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1932년 11월 초순경부터 1933년 3월경까지 경상북도 경주군 천북면(川北面) 성지리(聲池里)에 야학을 설치했다. 손보윤(孫普潤) 등 10여 명의 야학생에게 농촌의 병폐, 소작조건의 불합리성, 소작농민의 빈궁한 상태 등에 대해 설명했다. 또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일본인 이민(移民)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 동포는 압박과 착취를 받을 수밖에 없고 끝내는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만주(滿洲)의 황야로 추방되고 있다는 점, 러시아의 혁명의 상황과 농민의 단결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1933년 3월 중순경 이칠성·손봉호와 함께 ‘적색농민조합 준비위원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자리에서 운동방침·야학사업의 확장, 비밀보장 등 여러 문제를 협의하고 조직부, 선전부, 조사부의 3부를 설치하였는데, 조사부 위원을 맡았다. 마을 내 다수의 농민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손망익(孫望翼)을 동지로 규합하는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34년 9월 2~4일의 경주 신라제(新羅祭) 거행 때 등롱(燈籠)을 파괴했다가 손봉호가 검거되면서 일제 경찰의 검거 선풍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경주 적색비밀결사 사건’으로 경주뿐만 아니라 감포(甘浦)·울산(蔚山)·포항(浦港)·영일(迎日)·언양(彦陽)·방어진(方魚津) 등지에서 무려 80여 명이 경상북도경찰부(慶尙北道警察部)에 검거되는 과정에서 함께 체포되었다. 1935년 4월 초에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로 이송 송치되어, 이철성·이우(李雨) 등 동지 9명과 함께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8개월여 동안 신문을 받고 같은 해 12월 27일에 예심이 종결되었다. 1936년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18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즉시 공소(控訴)를 제기하였고, 같은 해 10월 31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1월 5일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36. 5. 12)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6.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