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898년 1월 6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동성동(東城洞)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東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政治經濟科) 교외생(校外生)으로 학업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1월 일본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신조선(新朝鮮)이라는 신문을 발간하던 이달(李達)을 만났다.
이달은 박진호·정만갑(鄭萬甲)·이만우(李晩雨)·김희관(金熙寬) 등 4명에게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과 신조선 발행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박진호와 이만우를 국내에 파견하였다. 박진호는 자금 모집을 위해 1920년 1월 28일 신조선 제1호와 태극기를 새긴 만년필을 가지고 고향인 대구로 이동했다.
같은 해 1월 30일 대구부 서문(西門) 안에 있는 영흥여관(永興旅館)에서 이기세(李基世)에게, 신조선 제1호와 만년필을 보여주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동참하라고 권유했다. 지금 중국 상하이(上海)에 임시정부가 있고, 일본 도쿄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동지들이 있으며, 자신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대표자라고 밝혔다. 2월 1일 대구부 서천대전정(西千代田町)에서 정내표(丁來豹)에게 독립운동 자금 30,000원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20년 1월 31일 대구 자신의 집에서 일본에서 이달과 협의한 내용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신대한민국청년독립단선언서(新大韓民國靑年獨立團宣言書)」 초고를 작성하고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1920년 2월 검거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6월 13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8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고, 11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2년 5월 13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20. 8. 21)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20. 11. 10)
- 집행원부(執行原簿)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20. 7. 13, 7. 29)
- 조선인(朝鮮人)에 대(對)한 시정관계잡건(施政關係雜件)-일반(一般)의 부(部)(2)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67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1281~128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13집 150면
-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박경식, 1975) 1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