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 1919년 4월 23일
4.
5. 1924년
6.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남 정주(定州) 사람이다.
1909년 11월 이재명(李在明)을 비롯한 평안도 출신의 지사(志士)들이 매국(賣國)의 원흉인 이완용(李完用)과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자 12월 6일 밤 그는 평양(平壤) 박태은(朴泰殷)의 집에서 이재명·박태은·김정익(金貞益)·이응삼(李應三)·이동수(李東秀)·전태선(全泰善) 등과 함께 회합을 갖고, 이완용의 처단은 이재명·김병록(金丙錄)·이동수가 맡기로 하고, 이용구는 김정익·조창호(趙昌鎬)가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복원(吳復元)·박태은·이응삼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창호와 전태선은 권총과 단도의 운반책임을, 또한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역적들의 동정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1909년 12월 22일, 이틀전에 김용문으로부터 이완용이 22일 오전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명동성당(明洞聖堂)에 갈 것이라는 정보를 전해들은 그와 동지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3일 오전 그는 김병록과 성당 부근에 은신하였고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여 성당입구에서 대기하였다. 오전 11시 30분쯤, 매국노 이완용이 추도식을 마치고 성당문 앞에서 인력거에 올라타자 이재명이 이완용과 저지하는 차부(車夫)를 단도로 찔렀다. 그러자 그는 이완용이 피투성이가 되어 거꾸러져 있는 것과 이재명이 호위 경관들에게 붙잡히는 것을 목도하고 일단 피신하여 동지들에게 상황을 전하였다.
그는 일제의 수사망을 교묘히 피하면서 각지로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일제의 궐석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후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던 그는 4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회(國民大會)에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뒤 다시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조국독립투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1924년 일경에게 붙잡혀 이전의 이완용 살해 미수사건으로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매천야록 53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12·21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52·25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476∼478·481·485·486·489·490·492∼494·497·498·503·515·518·520·524·554·555·557·558·562·563·565·56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