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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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南仲軍
이명 南相穆, 崔森一, 朴森一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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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17 훈격 애족장
1933년 9월부터 함남(咸南) 원산(元山)에서 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자의 깃발’ 등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고, 이듬해 8월에는 함남(咸南) 함흥(咸興), 흥남(興南)으로 옮겨 동지(同志)규합하는 등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4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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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원산에서 점원 등으로 일했다. 1930년 1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을 다니면서 고학(苦學)을 했다. 이때부터 목포(木浦) 출신 설상렬(薛相烈) 등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도쿄·고베(神戶) 등지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니혼대학을 중퇴하고 1932년 3월 귀국 후 원산에서 범태평양노동조합(凡太平洋勞動組合) 간부 박세영(朴世榮)의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함흥경찰서(咸興警察署)에 체포되었다가 이듬해인 1933년 7월 석방되었다. 이 사이에 유치장 내에서 주인규(朱仁奎) 등으로부터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과 범태평양노동조합의 「10월 서신」의 내용을 전해 들었다. 출옥 후 원산에서 이 노선에 기초한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1933년 9월 주로 운수노동자(運輸勞動者) 중심의 합법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元山勞動聯合會)와 함남노동회(咸南勞動會)에 들어갔다. 반(班)이나 분회(分會) 등 혁명적 노동조합의 비합법 하부조직을 결성하는 일의 책임을 맡아 최동선(崔東宣)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일제당국은 이들의 활동을 ‘조선노동조합운동 원산좌익’이라는 비밀결사운동으로 파악하였다.

먼저 최동선의 주선으로 채희룡(蔡熙龍)을 만나 기관지 「노동자의 깃발」의 출판을 추진하였다. 「노동자의 깃발」 창간호에는 ‘지금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여 우리 조직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공격을 방어해야 하므로 강고한 조직을 필요로 한다. 이에 우리는 태로(太勞) 10월 서신 및 9월 테제의 지침에 기초하여 과거 오류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선두에 용감하게 서서 조선노동조합운동 좌익의 지도 아래 우리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임무라는 것은 아직 조직되지 않은 대중을 조직화할 것, 공장과 직장에서 우리 기초를 설치하여 반동조합, 개량주의적 조합 내에 반대파를 결성하여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도모함으로서 대중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로 노동자 제군에게 약속하고 제군의 선두에 서서 적의 공격을 물리칠 것을 선언한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이때부터 1934년 11월까지 날마다 최동선·채희룡과 만나 「노동자의 깃발」을 십수 호를 출판하여 원산 등지에 배포했다. 5월 1일 메이데이 투쟁 등을 기획하는 등으로 활동했다. 메이데이 투쟁의 기본 방침은 ‘1일 9시간 노동제 실시, 자본가의 하인 관료 함남노동회를 파괴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탈출하여 조선의 완전한 독립, 강도(强盜) 일본제국주의 타도, 제국주의 전쟁과 소련 공격 전쟁 절대 반대’ 등을 내걸어 항일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한편 원산 내 각 공장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혁명적 노동조합의 하부조직을 결성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오무라제재공장(大村製材工場)·북선(北鮮)고무공장 등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원산 시내의 실업자·노동자·일반사용인 등을 포함한 가두반(街頭班)을 조직해 활동하였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던 중 한때 신변의 위험을 느껴 함흥·흥남지역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1934년 11월 러시아혁명기념일을 맞아 원산과 덕원(德源) 등 인근지역에 격문을 배포하다가 11월 3일 밤 원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는 ‘원산좌익위원회 사건’·‘원산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그 여파로 50여 명의 노동자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취조를 받은 후 1935년 5월 21일 남중군 등 9명은 검찰로 송치되었다. 1936년 4월 30일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함흥형무소(咸興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건강상태가 매우 악화되었다. 1938년 7월 14일 함흥형무소장의 보고에 따르면, 수용 당시는 신체 건강하고 정신에 이상이 없었는데 수용 후 나빠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른바 심신모약자(心神耗弱者, 심시미약자)로서 공주형무소(公州刑務所)로 집금(集禁)할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1939년 9월 6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35. 5. 2, 1936. 2. 10, 4. 26, 5. 2)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4. 11. 7, 1935. 5. 22, 1936. 5. 3)
  • 매일신보(每日申報)(1936. 4. 26, 5. 3)
  • 사상휘보(思想彙報)(조선총독부 검사국) 제5호 5면, 제6호 4면, 7호 235~245면
  • 사상월보(思想月報)(조선총독부 검사국) 제4권 제5호 61면
  • 1937~1939년 계호구금(戒護拘禁)에 관한 철(국사편찬위원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4집 14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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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중군 이명 : 남상목(南相穆), 최삼일(崔森一), 박삼일(朴森一) 함남 원산(元山) 원산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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