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대전(大田) 사람이다.구한말에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1919년 국민대회(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지원 등의 활동을 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김교훈은 1907년 군대해산과 더불어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에 투신하여 강원·충남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4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김교훈은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가입하여 권유부장(勸誘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앙총부는 경남 함안(咸安), 진주(晉州) 등지에 신상태(申相泰), 변상태(卞相泰) 등 2명을 파견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김교훈은 1919년 3월 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 등과 함께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같은 해 4월 2일 각계 대표 20여 명이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의정하였다. 그때 그는 유림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4월 23일 13도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이로써 「한성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해로 건너갔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만주 소항령(蘇項嶺)에서 노백린(盧伯麟)을 교관으로 30,000명의 병력을 훈련시키기 위해 자금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벌이기로 하고 귀국하였다.그는 우선 각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솔선하여 협조하지 않는 등, 자금 모집에 어려움을 겪자 계획을 바꿔 중국지폐를 위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1919년 6월 붙잡혀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34·135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9輯 74~83·112~129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5卷 471~47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176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83·186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14面
- 新東亞(1969. 4月號) 175~181面
- 每日申報(1919. 12. 27)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78·135·139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19輯 74~83·112~129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8輯 295·296·31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