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김성현은 경성의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참의부(參議府)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황해도 장연으로 돌아와 1918년경부터 사립 경애보통학교(敬愛普通學校)에서 1년 6개월 정도 교원으로 근무했으며, 1919년 11월말 장연에서 조직된 해서국민회(海西國民會) 재무(財務)로 활동하였다.
1920년 동경[東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고 재학 중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동경에서 안광천(安光泉), 한위건(韓偉健), 하필원(河弼源), 박낙종(朴洛鍾) 등과 함께 일월회(一月會)를 조직하고 한글 인쇄소인 동성사(同聲社) 설립에 참여하고 상무이사(常務理事)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정우회(政友會)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6월 동경에서 발간된 대중신문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김성현은 1926년 9월 제2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고 1927년 4월 예심 계류 중 면소(免訴) 출옥하였다.
9월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중앙집행위원과 조직부원으로 선임되었고, 11월 김준연(金俊淵)의 뒤를 이어 제3차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11월 20일경 최익한(崔益翰)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가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일화 3,300엔의 보조금을 수령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에 관련되어 안광천, 최익한, 도정호(都正浩) 등 30여 명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29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1930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고 12월 일본 경찰의 감시 소홀을 틈타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1931년 2월 26일 궐석 상태에서 진행된 항소공판에서 징역 6년을 받았다.
6월 소련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파주의 유기원(柳基元)의 집에 머무르다 서울로 상경하였다.
8월말 서울에서 체포되었으며, 1932년 5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다시 병으로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가 되어 출옥하였다.
1933년 9월 18일 출옥한 후 약 1년 4개월 동안 자택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中外日報(1928. 2. 4, 2. 18, 2. 20)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7집 1189면
- 要視察人 所在不明에 관한 건(1931. 9. 12) 思想에 關한 情報(1)
-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朴慶植) 1권 137면
- 要視察人[金世淵]의 所在不明에 관한 건(1931. 1. 17) 思想에 關한 情報(副本)
- 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 1934) 309면
- 정우회 임시총회에 관한 건(1926. 4. 10) 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1)
- 思想月報(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2) 제1권 제4호 167면, 제2권 제8호 37면
- 獨立(1946. 5. 8)
- 豫審終結決定(京城地方法院 : 1929. 10. 28)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東亞日報(1926. 7. 11, 1927. 4. 2, 1929. 11. 21, 11. 24, 11. 29, 12. 9, 1931. 2. 21, 2. 27, 9. 2, 9. 12, 1932. 5. 24, 5. 26)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 1930. 8. 30)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 1931.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