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6년 및 1927년 경상남도 도평의원 김기정은 도평의회에서 ‘조선인 교육의 불필요’와 ‘조선어 통역 철폐’ 등 ‘반(反)민족적’ 발언을 했다. 이에 1927년 3월 13일 경상남도 통영면(統營面)의 박봉삼(朴奉衫), 김상호(金相顥) 등 12명은 김기정을 규탄하기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동시에 김기정의 친일행위를 지역민에게 알리고 김기정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김기정의 고소로 4월 19일 12명의 청년들이 모두 통영경찰서(統營警察署)에 구금됐다.
5월 10일 통영 지역민들 34~35명이 구금된 청년들을 위해 변호인 선임 및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집 운동을 벌였다. 또한 지역민들은 시민대회 재개최를 협의하고 관련 인쇄물을 배포하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했다.
5월 11일 구금된 청년들이 단식 투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5월 12일 오후 9시경 지역민들이 통영경찰서로 몰려갔다. 이들은 구금된 청년과 면회를 요청하고, 동시에 김기정의 집으로 달려가 고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했다. 5월 13일 오전 9시경 단식 중 사망한 구금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수백의 군중이 통영경찰서와 김기정의 집으로 몰려가 격렬히 항의했다. 이때 김상훈은 김동근(金同根) 등과 함께 김기정의 친족 김기흔(金淇炘)을 구타했다. 시위군중이 3,000~4,000명으로 증가하자 사천(泗川), 마산(馬山), 부산(釜山) 등지에서 경찰 50여 명 이상이 출동했으며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포(空砲)를 발사했다.
김상훈은 경상남도 도평의원 김기정의 친일 행위를 규탄하는 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다. 1927년 12월 7일 부산지방법원(馬山地方法院) 마산지청(馬山支廳)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했다.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이른바 ‘소요(騷擾)’와 ‘상해(傷害)’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다음날인 12월 14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28. 12. 13)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5. 31, 11. 24,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