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19년 6월 하순경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양부(平壤府)에서 한영신(韓永信)을 회장으로 조직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에 참여했다. 한영신은 김보원 등 자신의 집에 모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지금과 같은 시세(時勢)에 부인이라고 해서 수수방관하는 것은 동포의 의무에 반하는 것이며 여성의 수치라고 했다. 김보원은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뜻을 같이했다.
1919년 8월 상순경 김용복의 집에 모여 감리교파 애국부인회와의 합동 등을 결정하였다. 당시 평양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지원과 항일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기독교 감리교파와 북장로교파가 각기 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상황이었다. 이에 임시정부에서 김정목(金貞穆)과 김순일(金淳一)을 국내로 파견하여 두 단체의 연합을 촉구한 결과 11월에 통합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가 조직되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주요 목표는 독립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1920년 4~5월 이래 각 회원과 동지들로부터 금반지나 은반지 등도 포함하여 군자금 2,400여 원을 모집하여, 이 가운데 2,100여 원을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나머지는 경비로 사용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독립군이 파견되면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해 친일파를 살해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김보원은 통합된 대한애국부인회본부의 부재무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0년 8월경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만 100여 명에 달하였다. 같은 해 10월 15일 검찰로 송치되어 심한 고초를 당한 후 그해 말경 주광명(朱光明) 등 동지 6명과 함께 방면되었다. 출옥 후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 사감으로 근무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2. 27, 1937. 6. 5)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제38권 25~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