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0217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斗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18 훈격 애족장
1919년 9월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송부할 목적으로 은화(銀貨)와 은메달을 제작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남(慶南) 통영군(統營郡)에서 김두옥(金斗玉)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하였으며, 경남(慶南) 부산(釜山)에서 오재영(吳哉泳)으로부터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道)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유고문(諭告文)을 전달받고 군자금 모금에 종사하고,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警告文) 등을 받아 강우석(姜佑錫)에게 배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1운동 이후 반일민족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각지의 부호(富豪)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부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같은 해 9월 박경선(朴慶善)으로 하여금 50전짜리 은화의 표면에는 ‘태극기(太極旗), 독립기념(獨立紀念)’이라 새기고 이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이라 새긴 큰 은메달 1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광욱(高光郁), 이근이(李根伊)와 공모하여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북천면(北川面) 방화리(芳華里)의 부호 이도식(李道植)을 찾아가 이를 보여주고 자신을 대한민국임시정부원이라 칭하며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두현은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의 김두옥(金斗玉)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다. 부산부(釜山府) 좌천동(佐川洞)에 있는 오재영(吳哉泳) 집으로 가서 군자금 모집에 대해 합의하였다. 이들은 오재영으로부터 그가 오태선(吳台善)에게 받은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도(道)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와 「유고문(諭告文)」을 받아 함께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또한 3.1운동을 이은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 중이던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과 「경고문(警告文)」 등을 받아 강우석(姜佑錫), 박만선(朴萬善) 등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경상남도 각지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동지 12명과 함께 진주경찰서(晉州警察署)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공소(控訴)를 포기하고 진주분감(晉州分監)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만기출옥일(1922년 5월 31일)을 얼마 앞둔 1922년 4월 15일에 가출옥(假出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5. 14, 6. 2~3, 6. 18)
  •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5. 14)
  • 조선일보(朝鮮日報)(1921. 5. 21)
  • 독립신문(獨立新聞)(1921. 5. 31)
  • 조선소요관계서류(朝鮮騷擾關係書類)(1921. 5. 14)
  •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 1967) 제1권 분책(分冊) 598~59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두현 - 경상남도 하동(河東) 군자금 모집
본문
1894년 4월 7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적량면(赤良面) 우계리(牛溪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각지의 부호(富豪)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해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1919년 9월 박경선(朴慶善)에게 50전짜리 은화의 표면에 ‘태극기(太極旗)·독립기념(獨立紀念)’과 이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이란 글귀를 각각 새긴 큰 은메달 1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제작한 은메달을 가지고 고광욱(高光郁)·이근이(李根伊)와 함께 하동군 북천면(北川面) 방화리(芳華里)의 부호 이도식(李道植)을 찾아가 자신을 임시정부원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은메달을 보여주며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3일 이내에 하동으로 가져오라고 하면서 여비로 10원을 수취하였다. 이후 9월 중에 군자금 모집과 제2차 3·1운동을 벌일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경남 통영군(統營郡)의 김두옥(金斗玉)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고, 함께 부산부(釜山府) 좌천동(佐川洞) 오재영(吳哉泳)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리고 오재영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윤태선(尹台善)에게 받은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도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와 「유고문(諭告文)」을 건네받아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3·1운동에 이어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과 「경고문(警告文)」을 받아 배포하였다. 이들은 10월 1일에 제2차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함께 노력하였다. 김두옥 등과 함께 경상남도 각지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다가 1921년 5월 초순경 동지 12명과 함께 경상남도 경찰부 및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항소를 포기하고 진주분감에서 옥고를 겪다 4월 15일에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30년 경남 진주군 진주면(晋州面) 평안동(平安洞)으로 전적(轉籍)하여 생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두현(관리번호:40217)
*오류 제목
*오류 유형
*오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