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1운동 이후 반일민족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각지의 부호(富豪)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부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같은 해 9월 박경선(朴慶善)으로 하여금 50전짜리 은화의 표면에는 ‘태극기(太極旗), 독립기념(獨立紀念)’이라 새기고 이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이라 새긴 큰 은메달 1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광욱(高光郁), 이근이(李根伊)와 공모하여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북천면(北川面) 방화리(芳華里)의 부호 이도식(李道植)을 찾아가 이를 보여주고 자신을 대한민국임시정부원이라 칭하며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두현은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의 김두옥(金斗玉)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다. 부산부(釜山府) 좌천동(佐川洞)에 있는 오재영(吳哉泳) 집으로 가서 군자금 모집에 대해 합의하였다. 이들은 오재영으로부터 그가 오태선(吳台善)에게 받은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도(道)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와 「유고문(諭告文)」을 받아 함께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또한 3.1운동을 이은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 중이던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과 「경고문(警告文)」 등을 받아 강우석(姜佑錫), 박만선(朴萬善) 등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경상남도 각지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동지 12명과 함께 진주경찰서(晉州警察署)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공소(控訴)를 포기하고 진주분감(晉州分監)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만기출옥일(1922년 5월 31일)을 얼마 앞둔 1922년 4월 15일에 가출옥(假出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5. 14, 6. 2~3, 6. 18)
- 매일신보(每日申報)(1921. 5. 14)
- 조선일보(朝鮮日報)(1921. 5. 21)
- 독립신문(獨立新聞)(1921. 5. 31)
- 조선소요관계서류(朝鮮騷擾關係書類)(1921. 5. 14)
-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김정명, 1967) 제1권 분책(分冊) 598~59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