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鎭東面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변상태(卞相泰)로부터 운동상황을 전대 듣고,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권태용(權泰容)·변상헌(卞相憲) 등과 함께 고현 장날인 3월 2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고 인근지역에 이같은 계획을 알렸다.
3월 28일 오후 1시, 그는 고현 장터에 모인 6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돌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鎭東面)으로 행진해 갔다. 이 정보를 입수한 진동헌병주재소에서는 마산(馬山) 주둔 일본군 야포대대에 응원 요청을 하였기 때문에 현지의 헌병 7명과 마산 및 각지에서 응원 출동한 24명의 일본군을 무장시켜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5시경, 이곳으로 시위행진하여 오던 군중은 급기야 일본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군에게 맨주먹으로 대항하였으나, 일제의 무력행사로 인하여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는 4월 3일 정오, 진동 성터 위에서 수백명의 면민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진전면 양촌리(鎭田面良村里)를 출발하여 시위행진하여 오던 수천명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2시, 사동리(社洞里) 다리앞에서 급보를 받고 출동한 진동헌병주재소 직원 8명과 일본인 재향군인 30여명은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군에게 맨주먹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오후 3시, 응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마산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의 야만적인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주동자로 체포되어, 이해 5월 20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부터 1925년까지는 삼진(三鎭, 鎭田·鎭北·鎭東)의 청년회와 삼진 농민조합, 삼진소비조합을 조직하여 일본인과 친일파 지주에 대하여 소작료 불납,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고, 군수등의 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하다가 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4월 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협박죄로 다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6면
- 수형인명부(창원군진북면장 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43·245·2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