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식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학자들이 빠지게 된 것을 통분해 하고, 또 일제가 광무황제에게 결재하도록 강요한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에 유림들이 들어있음을 알고,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소위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김창숙(金昌淑)·이기정(李基定) 등 한국 유림대표 137명 중의 한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후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전달하였고,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하였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또한 그는 이기정(李基定);·송회근(宋晦根)·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교(張碩敎)·송규선(宋圭善)·송훈익(宋勳翼)·김희규(金熙奎)·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송천흠(宋千欽) 등의 유림들과 성주읍 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에 의한 독립만세시위 계획이 있음을 안 그는 이들과 협의하여 함께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4월 2일 오후 1시, 먼저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집결하였던 기독교도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그도 시장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겁을 먹은 일본 경찰주재소에서 발포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이에 굴하지 않고 밤 11시까지 계속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어 8월 21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248·252면
- 벽옹 김창숙일대기 95면
- 판결문(1919. 8. 21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93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466·467·4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