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연감 6 8 9 14 18 23 24 71 74 12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 334 343 344 47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3면
- 고등경찰요사 15 88 21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5 26 29면
- 기려수필 243 247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10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38·453 609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 36 40 42 43 46 54 143 151 218 275 330 338 344 35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53 73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6 72 157 162 177 192 199 202 207 420 4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18 1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95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98 10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16 1217 1218 131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9 49 15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6 56 89 10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4 5 8 108 144 151 159 160 161 165 167 437 438 473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2 43 44 48 51 54 59 78 79 80 81 84 90 91 103 104 105 117 11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8 142 143 145 151 155 156 157 176 241 279면